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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91 제2진 2만여 명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 끄는 제3진 1만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 왜군들은 동 · 중 · 서의 세 길로 나누어 김해 · 양산 · 밀양 · 대구를 지나 거침없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명장으로 추앙받던 신립 (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아 적진으로 내려 보냈지만, 깃발을 휘날리고 창검을 번득이며 공격해 오는 왜군의 예봉을 꺾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彈琴 臺)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적진에 나아간 명장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리하여 왜군은 물밀 듯이 진격하여 서울에 이르 렀다. 그 날이 5월 2일(양력 6월 11일)이었다. 왜군 제1진이 부산포를 침공한 지 20일이 채 되지 않아서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서울에 진격한 왜군 제1진은 평안도로, 제2진은 함경도로, 제3진은 황해도로 진 군을 계속하였다. 제1진은 임 진강을 건너 개성을 거쳐 평 양으로 진격하였다. 이 날이 7월 24일(음력 6월 16일이었 다. 관군은 파죽지세로 몰려 드는 왜군에게 무방비 상태 로 국토를 내주고 말았다. 이 무렵, 선조(宣祖)는 “도 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전교 (傳敎)를 내려놓고는 몰래 개 성 ·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 했다. 그의 머리속에는 나라 도 없고 백성도 없었다. 오로 지 압록강을 건너 명(明) 나 라에 내부(內附)하기만을 생 각하고 있었다. 선조의 머리속은 온통 자신의 안전 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북쪽으로 갈 생각뿐이었다. 선조는 어전회의에서 ‘어디로 도망 갈 것인가?’ 하는 논의가 전부였다. 선 조 왈, “당초 에 일찍이 요 동(遼東)으로 갔더라면 좋 았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 깝다.” 이 때, 류성룡(柳成 龍)이 나섰다.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1760년 변박(卞璞)이 임 진왜란 당시 부산진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임진왜란 당시 송상현 부사와 동래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동래성 싸움을 묘사한 전쟁기록화 동래부순절도(부 산일보 제공)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