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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의 제1차시위운동
1929.11.3
나주역사건 후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은 경찰과 교사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계속되었으나 그것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것은 11월 3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광주역에서 광주고보 학생들이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한데 이어 오후에는 광주고보, 광주농교, 광주사범 학생들이 합류해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당시 신문은 11월 3일의 시위를 10년전 3.1운도이 있은 이후 처음 보는 큰 사건으로 보도했다. 이는 광주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에거도 이 날의 대규모 시위가 대한한 사건으로 보여졌음을 나타내 준다. 여론이 비등해지자 충독부 당국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보도를 금지시켰다.
이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민족 해방과 식미지 노예교육, 민족동화교육의 철폐를 위한 학생들의 저항은 맹휴투쟁에서 한단계 진전하여 집단적인 가두투쟁으로 발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