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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4년 8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산나물이라고 한껏 자랑을 하는데 향기와 맛이 일품 이었다. 흔히들 호남을 의향(義鄕, 의로운 고장), 예 향(藝鄕, 예술의 고장), 미향(味鄕, 맛의 고장)으로 일 컫는데, 나는 호남 의병 전적지 순례로 의향과 미향 을 한껏 느끼며 즐겼다. ‘의사 전공수용 순국 불망비’ 전해산 의병장 묘소는 양지바른 산비탈에 조촐하 게 안장돼 있었다. 손자 내외의 성묘에 이어 나도 무 덤 앞에서 두 번 엎드려 절을 드렸다. 오랜 세월 바람 과 서리에 닳아진 비석에는 ‘의사전공수용순국불망 비(義士全公垂鏞殉國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었다. 성묘를 마치자 그리 멀지 않은 번암면 대론리 마 을로 안내했다. 그곳은 전해산 의병장 생가 마을로, 당신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머슴살이로, 소작인으 로, 일제강점기 동안, 근근이 목숨을 이어온 것만도 감지덕지 살았다는 '피눈물의 마을'이라고 했다. “이 골목 끝집에서 사셨다고 하더군요,” 일제 강점기나 별반 다름이 없는 돌담길이지만, 지붕은 대부분 초가에서 기와로 바뀐 듯 하고, 골 목 길은 시멘트로 포장돼 있었다. 전해산 장군이 대구감옥소에서 순국하자 부인도 잇따라 순절하여 대가 끊어졌다. 그래서 전해산(본 명 基泓) 장군 아우(基英)의 둘째 아들 진규(전영복 의 아버지)씨가 출계하여 사후 양자로 입적하였다. 호남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전해산 의병장이 소위 ‘폭도 수괴’로 몰려 순국하니, 일제 강점기 남은 가 족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목숨을 부지 하는 걸 감지덕지하며 살았다. 한 시간 남짓 이런저 런 곤궁했던 집안 이야기를 듣고서 곧장 남원을 떠 나왔다. [전해산 의병장 행장] 전해산(全海山)은 1878년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 났다.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 (海山)이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 (經書)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해산 의병장(국가보훈부 제공)전해산 의병장이 남긴 전투기록인  『진중일기(陣中日記)』(순천대 박 물관 소장) 전해산 의병장 묘와 '의사 전공수용 순국 불망비'(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