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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4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의 손길을 뻗어왔다. 그리고, 8월 22일 제1차 한일협 약에 의하여 고문정치(顧問政治)가 시작되었는데, 재 정과 외교를 일본이 하나하나 간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특히, 제2차 한일협약(이른 바 1905년의 ‘을사보 호조약’, 을사늑약이라고도 함)에서는 우리나라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 이 노골화되었으며, 우리의 외교권마저 일본에 위탁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 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나라가 형해화(形骸化)된 상황에서 일본은 헤이그(Hague) 특사사건을 빌미로 삼아 고종(광무 황제)의 숨통을 죄어왔다. 1907년(고종 44년) 7월 3 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도를 찬 무 관들을 거느리고 고종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음흉 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 리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는 것만 못하다”는 막말을 늘어놓았다. 이 때 고종황제의 심 정이 어떠했겠는가. 이러한 와중에 친일인사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 다. 7월 6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발 빠르게 어전회의 를 개최하고 고종황제를 곤경으로 몰아갔다. 황제의 답변은 간단했다. “짐(朕)은 헤이그 특사에 관해서 아 는 바가 없다”라는 짧막한 답변을 하고는 멀리 천장 을 바라보았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의 말 한 마디 가 침묵을 깨뜨렸다. “폐하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사 죄하든가, 아니면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하세가와 주차군사령관에게 사죄를 하는 것이요. ……”라고 황제를 다그쳤다. 참으로 무엄한 행동이었다. 이완 용은 이보다 한술 더 뜨는 친일파가 아니던가. 이완 용과 송병준의 손뼉이 척척 들어맞았다. 고종황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였다. 이 것이 그 당시의 의정부 대신들과 고종황제의 갈등관 계였다. 이로써, 황제와 대신들 사이에 더욱 높은 벽 이 둘러쳐지게 되었다. 그리고, 친일 매국대신들은 통감 이토의 눈치만을 살피면서 황제의 양위를 떠들 고 다녔다. 이에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가세 하여 회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고, 황 제의 퇴위를 압박하였다. 고종은 더 이상 버틸 힘을 1884년 11월 18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5문·10문 문위우표 2 종(우정사업본부 제공) 현재 남아있는 우정총국 건물(매일경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