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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4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자 그분은 비록 앞을 볼 수 없을지라도 당신 목숨이 살아있는 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 각했습니다. 1906년 1월, 장성 기우만이 주도하는 곡성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에 참여했으나 호응 이 적어 무산되자 다음날을 기약한 뒤 광양으로 돌 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면암 최익현 선생이 전 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찾아가던 도중에 최익현 이 패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발길 을 돌렸습니다.” - 시각장애인으로 대단한 투혼입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초인이었습니다. 19세기 말, 일 본의 침략에 당신의 신체장애는 결코 장애물이 아니 었습니다. 광양에 돌아온 그는 일흔 나이에도 의병 을 일으킨 최익현에 견주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낫다 고 생각을 하면서 직접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물리 칠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먼저 거의에 적극적인 장 성의 기우만, 창평의 고광순 등과 연락하여 창 의 날 짜와 장소를 물색하면서 이전의 의병들이 패전한 원 인이 훈련 미숙과 무기 열세라는 점을 깨달았습니 다. 그분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산중에서 의병들에 게 일정한 훈련과정을 거치는 게 필요하다고 다른 의병장과 의견을 모은 뒤,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위 치한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의병 훈련장을 만들었 습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1906년 단행된 관제 개편으로 실직한 향리들을 적극 설득시켜 의병대열에 합류시 키는 한편, 가을걷이가 끝난 농민들을 모아 1906년 11월 5일, 약 200여 명을 이끌고 구례 중대사로 갔 습니다. 그러나 기우만, 고광순 의병장과는 연락 과 정에서 날짜가 잘못 전달돼 그들의 부대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곧장 광양으로 되돌아가 군아(郡衙; 지금의 군청)를 점령하고 군수를 결박한 뒤 무기와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이어 순천의 관아를 습격할 계획이었지만, 그새 날이 밝아오자 이를 취소하고 삼삼오오 흩어져 구례로 돌아오다가 구례군수 송대 진에게 체포됐습니다. 곧 바로 순천분파소로 압송되 었다가 광주로 이감, 신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백낙 구 의병장 말씀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오늘날 이른바 대한국(大韓國)은 누구 의 대한국인가. 을미년에는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 가 군대를 풀어 대궐을 점거하여 국모를 시해하였 다. 만국이 이 소식을 듣고 실색하였다. 팔도 백성들 이 애통해 한지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위로는 복수 의 거의(擧義)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2017년 광복회 광주·전남연합 지부에서 펴낸 『조선망국기 호 남의병사』 표지(연합뉴스 제 공). 이 책 3장에 백낙구 의병장 의 활동이 서술돼 있다. 『매천야록』에서 백낙구 의병 장에 대해 서술한 매천 황현(黃 玹)의 초상화(채용신 작, 보물 1494호,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