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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4년 3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23일 바람이 불다. 낮에 주사(主事) 홍순복(洪淳復)이 국수 두 찬합을 보내주었다. 아마도 그의 생일상에 쓰려던 것일 테인 데 노인 대접할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을 터이다. 참으로 고맙고 고맙다. 떠돌이 살림의 군색할 즈음이 라 아무것도 보답할 것이 없어, 시 한 수로 감사히 받 노라는 뜻을 대신한다. 25일 맑음. 손자 창로(昌魯)를 데리고 두릉의 매부 이상룡이 우거하는 집으로 갔다. 살던 집은 장차 홍참판(=홍승 헌)의 거처가 될 터이라, 막 그 서쪽 한켠에 방 한 칸 을 꾸미고 있었다. 비좁고 군색하여 곤란한 일 아님 이 없다. 다만 집 뒤편의 우거진 숲이 한 번 낫질에 며칠간의 땔감을 마련할 만하다. 내 사는 곳 형편과 견주어보니 이것은 한가지 다행이다. 점심으로 국수 를 차렸는데 두 대접을 달게 마셨다. 배고프고 목마 르던 끝이라 음식을 알맞게 먹으라는 훈계를 가릴 겨 를이 없으니 매우 우습다. 집 아이가 유하현(柳河縣)에서 돌아왔다. 염려하던 나머지에 한 가지 반가운 일이나, 다만 그 처음부터 끝까지 곤란했던 사정을 들으니 사람으로서 견딜 일 이 아니다. 또 밭을 구하고 집을 알아본다던 계획은 하나도 성사된 것이 없고, 이리저리 주선하여 겨우 살 집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앞으로 닥칠 군색한 상 황이 미리 걱정스러워 탄식이 나온다. 이곳에 온 지 넉 달인데 여태 몸 편히 눕고 발붙일 땅을 얻지 못하 였다. 터전을 닦고 가꾸는 어려움이 예로부터 당연하 지만, 소졸함 때문에 온 탄식이니 어찌 갈증이 나서 야 우물을 파는 것과 같지 않으랴? 26일 밤비가 조금 내렸다. 아침에도 쾌청하진 않았으나, 옷 적시며 가야할 염려는 풀렸다. 곧 돌아 가려고 길을 나설 때, 일찍이 청인(淸人=중국인) 이소 운(李笑雲)이 글 잘한다는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던 지라, 지나는 길에 그의 자치단소(自治團所)에 들렀 다. 필담으로 물으니 소운이 출타했다고 하는데, 젊 은 사람이 문자를 제법 이해하였다. 1910년 9월 말 강화학파 양명학자 이건승(李建昇)이 남만주 서간 도로 건너가기 전 개성에서 동지 홍승헌을 기다리며 찍은 사진. 그 는 이 사진 뒷면에 망명 직전의 심정을 “저 삐죽하고 여윈 모습 나와 다름없으나, 이 한(恨) 굽이 서린 참 난 어디에서 찾을꼬!”라는 시로 표현했다(정양완 제공). 이건승은 1910년대 서간도 일대에서 홍승 헌 · 정원하 등과 교류했는데, 만주 이주와 생활상 등을 적은 『해경당 수초(海耕堂收草)』라는 고난의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