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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 1950년 9월의 역사적 사건 :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38도선 넘은 북진 9 자, 6월 25일 일요일에 38도선 전역에서 대한 민국을 향해 군사공격을 개시함으로써 민족의 참극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북한은 남조선이 북침했기에 자위의 수단으로 반격했다고 변명 했으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스탈린 및 마오쩌둥과의 공모 아래 김일성이 도발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군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남한에 주둔하며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켜주던 미군이 1949년 6월 30일까 지 전면 철수했기에, 게다가 한국군 수뇌부의 오판에 따른 결정으로 군이 일요일 휴가에 들 어갔기에 북한군은 파죽지세처럼 남침을 계속 했고 사흘 뒤 서울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북한군은 남침 을 계속하지 않고 서울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방심했거나 남쪽에서 지하에 들어가 있던 남 로당에 의한 호응봉기가 뒤따를 것으로 기대 했던 것 같다. 그 시점에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 공 3군사령관으로 막 취임한 정일권 소장의 표 현으로, 이 사흘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이 짧은 기간에 트루먼 미 국 대통령의 결 단에 발을 맞춰 유엔(UN)이 개입하기로 결정 하고 미국을 비롯한 영국·프랑스·터키·호주 등 16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대한민국을 수호 하기 위해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우방국들의 군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북 한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고 준비가 없었 던 대한민국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쿄에 본부를 둔 미국 극동군사령부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총사령관에 겸임 발령된 7월 7일에서 1개월 정도 지난 8월 초순 과 중순 사이에 겨우 낙동강 일대에서 사생결 단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침을 일 정하게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극적 성공으로 일거에 전세 바꿔 맥아더의 상륙작전 계획은 이 시기에 마련 되었다. 그는 판세를 뒤엎기 위해서는 비상한 결단이 따라야 한다고 판단하고, 인천에서의 상륙작전을 준비해 성공시킨 것이다. 당황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미국 해군 상륙지 휘함 마운트 맥킨리호에서 인천상륙작전  상황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 인천상륙작전 당시 진격하는 미군 해병대(이상 서울신문  제공) 6 · 25전쟁 발발 3개월 만에 되찾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수복 후 중앙청 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군 해병대  장병들(국가기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