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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 6·3사태 60주년에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9 국대륙이 중국공산당에게 넘어가는 것 같은 위기를 느끼면서 만일 중국 대륙이 중국공산 당에게 장악되는 경우 그러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타산(打算)했 기 때문이다. 그 타산은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예견되기 시작한 1947년을 계기로 더욱 확실 해져,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은 전쟁을 도발한 일본을 징치(懲治)하는 쪽에서 일본의 국력을, 특히 군사력을 키워주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 래서 ‘자위대’라는 이름 아래 일본의 군사력을 제도화시키면서 후원했고, 전범으로 수감했던 정치인들과 관리들 그리고 기업인 들을 석방 해 일본의 보수적 정치체제와 관료체제 및 재 벌을 육성했다. 미국은 이렇게 ‘역(逆) 코스’를 밟으면서 남 한에서도 ‘조선총독부’ 시대의 유산을 지켜주 는 방향으로 점령정책을 폈으며, 동시에 남 한이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로 말미암은 유감 과 아픔을 잊고 일본과 우호친선관계를 맺도 록 유도했다. 이 정책에, 대한민국 제1공화국 의 이승만 대통령은 꿋꿋하게 저항했다. 구한 말 이후 일제의 조선침략을 비판하고 견제했 던, 그리하여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 는 미국의 요구와 심지어 압력을 물리치고 반 일노선을 걸었다. 그 상징적 사례가 1952년의 평화선 선포였다. 그는 한반도 해역에 서방세 계에서 흔히 ‘리(Rhee) 라인’이라고 불린 평화 선을 설정하고, 이 선을 넘어 들어와 어로활동 을 하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함으로써 한반도 해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권을 명백히 천명 1953년 10월 15일 한일회담에서 한국의 재산청구권 요구 자체 를 인정할 수 없다는 구보타 간이치로 일본측 수석대표의 망언 을 기록한 외교문서(연합뉴스 제공) 1964년 6월 3일 서울시민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모습(대덕 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