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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⑧ 89 자 그즈음 바쁜 업무 파악으로 차일피일 두어 달이 지났다. 2007년 4월 초, 나는 호남 의병 전적지 7차 답사 여정을 짜면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채근했다. 그 러자 공휴일인 4월 5일 남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런데 당신 아버님(전진규)이 그 무렵 서울에 사신다 기에 그 전날인 4월 4일에 아버님 얘기를 듣기로 약 속했다. 약속 며칠 전날 전영복 부부가 당신 댁에서 식사 를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청하였지만, 끝내 거절하고 는 그날 오후 2시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지하철 5호 선 방화 역에서 조세현 위원을 만나 미처 5분 거리도 안 되는 한 아파트로 찾아갔다. 전진규 씨는 노환으로 수전증, 언어장애 등으로 며느님 도움으로 몇 마디만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배운 게 없어요. 국문(한글)도 못 깨친 무식 꾼인데다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큰아버지(전해산 장군)는 돌아가셨고, 부모조차 모두 일찍 여의어서 부모 없는 아이로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어요.” 당신은 평생을 머슴으로 소작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장가도 서른이 되도록 못 가 하는 수 없이 나이 를 두 살 속여서 띠 동갑인 18세 처녀에게 갔다는 얘 기에, 곁에 앉은 마나님은 “내가 속아서 시집갔다” 고, 그때 신랑이 서른 살난 총각이면 가지 않았을 거 라고, 6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억울해 했다. “내가 일자무식꾼이라 큰 아버지(전해산 장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아들한테 물어보시오. 걔 는 다 알고 있을 거요.” 나는 그날 서울 아들 집에서 자고는 이른 아침 여 장을 꾸린 뒤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닦고, 곧장 강남고 속터미널로 갔다. 그런데 이날은 주말에 한식, 식목 일까지 겹치고, 날씨마저도 ‘어매 환장’ 하도록 쾌청 한 탓으로, 승객들이 엄청 많았다. 남원에는 예정 시 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지만 전영복 씨 내 외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남원 시내 밥집으로 안내하려는 것을 일정이 빡빡하다는 내 사정을 말하자, 곧장 당신 할 아버지 묘소로 향했다. 마침 그곳으로 가는 도중 산 채비빔밥 집이 보여 거기서 마음에 점을 찍었다. 밥집 주인은 모두가 지리산에서 손수 뜯은 자연산 전해산 의병장 후손 (오른쪽부터 아들 전진규 씨, 며느리 양복례 씨,  손부 송화진 씨) 전해산 의병장 동상(전북 장수군 번암면 소재, 전남타임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