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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정미칠조약, 대한제국의 조정을 옥죄어오다 89 나라에 침투시키면서 침 략의 손길을 강화해나갔 다. 이 무렵, 미국‧영국‧ 러시아‧프랑스‧이탈리 아 등 세계열강들이 우리 조정에 통상을 요구해오고 있었다. 또 청(淸)‧일 두 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 (宗主權)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부패한 관료사회는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있어서 민중들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한 상태 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나라 사정은 개화사 상을 가진 젊은 정치인들의 개혁 대상이 되었다. 더 욱이, 개화사상을 가진 이들 정치인들을 자극한 것 은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 이후 파견된 청 나라 군대였다. 청은 군란이 평정되었지만, 군대를 철수 하지 아니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다. 이 때, 생활의 핍팍을 겪고 있던 백성들이 관청을 습 격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일 본은 임오군란으로 발생한 일본 측의 피해배상을 요 구하며 우리 조정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를 계기로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 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근 대화를 꿈꾸던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들에 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는 우정총국 (郵政總局)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는 데,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개화파 를 지지할 민중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일본 군대가 약속을 어기고 철병함으로써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 간의 충돌이 격 화되었는데,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1894년 7월에 일 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는 ‘갑오변란’을 일으키면 서 우리의 조정을 옥죄어왔다. 이에 더하여, 일본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明成皇 后)를 참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면서 조선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더욱 키워갔다. 일본, 침략의 야욕을 키우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 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 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우리나라에 한 뼘 한 뼘 침략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때 조선 대표 신헌의  60세 때 초상화(나무위키  제공) 조약이 체결된 강화유수부 연무당(가운데) 전경(독립기 념관 제공) ‘조일수호조규’ 일본문(위키백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