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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④ 89 리에 밝고, 지역 주민과 일정한 연고를 맺고 있으며, 관동의병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오주일 등 해산 군인들은 전술 전략에 밝아 이론과 실제를 골고루 갖췄기 때문이었다. ‘안담살이 의병부대’는 막강한 의병부대로 1908 년 음력 3월 무렵, 그가 머슴살이를 하던 법화마을 과 가까운 동소산(桐巢山)에서 창의의 깃발을 드높였 다. 안담살이 의병부대의 등장은 항일투쟁을 위해서 라면 모든 계층이 서로 협력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 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머슴 출신이 이끄는 의병부 대에 비로소 양반 유생들이 가담한 획기적인 창의의 깃발이었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주 근거지는 광양의 백운산으로, 그들의 투쟁 무대는 보성, 순천을 비롯 한 전남 동부지역과 순창, 남원 등 전북 동남부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일제는 1910년의 한일강제병합에 앞서 그 정지작 업으로 이른바‘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 作戰)’을 펼쳤다. 이는 특히 전남지방 의병을 뿌리 뽑 기 위한 의병 초토화 작전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구축하였 다. 일본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시시각각 옥죄 어 오자 안규홍 의병부대도 동요하여 투항하는 부하 들이 속출했다. 결국 1909년 9월 25일, 안규홍 의병장은 부장(副 將)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부하 가운데 일부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체포되거나 투항하기도 했다. 혹은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안담살이’ 의병의 해산과 지도부의 체포는 남한대 토벌작전의 종료를 의미했다. 비록 안규홍 의병부대 는 일본군의 소위 ‘대토벌작전’으로 무너졌지만, 이 땅에 가난한 농민 중심의 의병부대로, 우리 의병사 에 큰 금자탑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에 체포된 안규홍은 광주에서 대구형무소 로 이감된 뒤 이듬해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념하 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 을 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