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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강화도조약, 조선침략의 시작이었다 89 또, 흥선대 원군이 천주 교에 대한 탄 압정책을 펴 면서, 우리나 라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 사를 처형한 일로 말미암 아 프랑스와 의 충돌도 많 은 국력의 손 실을 초래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1866년(고 종 3년) 1월 21일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南鍾三) · 홍 봉주(洪鳳周) 및 프랑스인 뵈르뇌(Berneux, S. F) 등 9명을 처형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의 탄압은 이 날 부터 처참한 학살로 이어졌다. 프랑스 선교사 9명 외에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 8천여 명이 학살된 것으 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천주교 탄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동안 압수 한 천주교 관련 서적과 그 원판을 소각함으로써 천주 교를 이 땅에 발붙일 수 없게 하였다. 1월 24일에는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 8도가 천주교의 단속에 나섰으며, 관 · 민 중에서 천주교 신자를 알려주는 자 에게는 상을 내리고 숨기는 자에게는 죄로 다스리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 탄압은 조선을 탈출한 리델 (Ridel, F. C)이 중국 천진(天津)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 스 함대사령관 로오즈(Roze, P. G) 제독에게 전달되 었다. 1866년 9월 18일 로오즈 제독은 군함 3척을 이 끌고 인천을 거쳐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 이르 러 우 리 조정을 긴장케 하였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어 영중군(禦營中軍) 이용희(李容熙)로 하여금 프랑스 군 함을 철저히 경계토록 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 洋擾)의 시작이었다. 그 뒤 로오즈 제독이 전함 7척과 600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물치도(勿淄島) 앞바다에 들어와서 “너희 나라 는 무슨 이유로 선교사 9명을 살해했느냐, 이제부터 너희들도 죽일 것이다”라는 말로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강화유수 이인기(李寅夔)가 성을 굳게 지켰으며,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를 파견하여 한강연안을 경비토록 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 장교 앙리 쥐베르(1844~1909)가 그린 프랑스군의 강화도 갑곶 침공 장면(위키피디아 제공) 1865년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중인 프랑스 극동함대의 기함 라게리 에르호(가운데, 위키피디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