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page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어린 핏덩이 내동댕이친 일경에 굴하지 않던 “이애라” 89 을 업고 동분서주했는데, 서울 아현동에서 그만 일 본경찰에 잡혔다. 이때 어린 딸을 낚아챈 왜놈들은 바닥에 딸을 내동댕이쳐 죽게 하고 이애라 지사를 잡아다가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숨져 출옥 뒤 여러 차례 겪은 고문 후유증 상태에서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그 러나 사흘이 멀다하고 형사들이 찾아와 남편을 찾 아내라고 행패를 부리고, 걸핏하면 경찰서로 연행 을 당하자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시숙인 이규풍 (李奎豊)이 사는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한다. 스물일 곱 나이로 이 지사는 어린 두 아들과 함께 경원선 열 차로 원산으로 갔다가 배로 함경북도 웅기(雄基)항에 도착했으나, 그만 배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에게 잡히 고 만다. 당시 이애라 지사는 ‘요시찰’ 인물이었으므 로 이미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 순사가 연락을 받 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웅기 경찰서에서 순사들은 이 지사의 짐을 수색하 고 독립운동가인 남편의 행방에 대해 추궁을 하는 등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미 국내에서 여러 차례의 고문과 오랫동안의 투옥생활로 몸이 망가진 이애라 지사를 보고 경찰은 그가 옥중사망할 때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의사를 불렀다. 그런데 이때 왕진 온 의 사는 다름아닌 큰 시숙 이규풍의 아들이었다. 이애 라 지사는 의사인 시조카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구 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으 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극적으로 아내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 이규갑 지사는 몇 해만의 해후를 했다. 하지만 안 타 깝게도 이애라 지사는 며칠 뒤 어린 두 아들을 남기 고 고문 후유증으로 꽃다운 나이인 스물일곱 살을 일기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당시 이규갑 지사는 러시아에 창설한 한국 독립군 사관학교 교장 으로 일본 마적단과 싸우는 등 무장투쟁의 한 가운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이애라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 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2004년 5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아 이애라 지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겼다.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 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 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 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이윤옥 충남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이애라 애국지사 충국순의비에 선 필자. 뒤에 보이는 무덤이 이애라 지사 시댁 가족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