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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⑩ 89 삶’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당시 석주 등이 집을 빌려 손질을 해놓아 살만하게 고쳐놓으면 중국인들이 와 서 내쫓아 버리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석주를 지탱시켜 준 것은 아마도 먼저 간 사람들의 인내하는 삶을 반추하는 일이었으리라! 석주는 동양에서는 중국 주(周)나라 의 기초를 다진 고공단보(古公亶父, 周 문왕의 조부) 의 곤궁했던 삶을 상상하곤 하였다. 또한 서양에서 는 나폴레옹의 ‘불가능은 없다’라는 외침을 되새기곤 하였다. 한편 일기에는 석주의 외아들 동구 이준형(李濬 衡, 1875-1942)이 등장한다. 1911년 당시 석주는 외 아들 이준형(당시 36세), 손자 병화(당시 5세) 등 50 여 가솔을 이끌고 망명 한 터였다. 이준형은 만주에 서 아버지를 모시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경학사, 부 민단,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석주가 순국한 후에 귀국한다. 그런데 귀국 후에 임청각 가까운 곳에 경찰서가 있 어서 항상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또 일본 관료들이 친일을 강요하며 회유하자 이준형은 가족을 이끌고 임청각을 떠나 교통이 불편한 월곡면 도곡동, 일명 ‘돗질’로 거처를 옮겼다. ‘돗질’은 재사(齋舍)가 있는 곳 으로 임청각으로부터 강을 따라 꼬불꼬불 30리 길이 었다. 그곳에서 이준형은 망명 20년을 기록한 『석주유 고(石洲遺稿)』를 10년 동안 정리하였다. 지금 우리가 「서사록」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이때 이준형이 정리해 놓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1942년에 아버지 문집 석 주유고의 정리를 마친 이준형은 9월 2일 자신의 생 일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 욕을 더하게 될 뿐이다”라며 동맥을 끊어 순국하였 다. 하루를 더 살면 하루의 치욕을 더하는 것이지만 아버지 행적에 대한 기록을 마치기 전에는 자결조차 할 수 없었던 그의 모습 앞에서 필자는 흐르는 눈물 을 감추기가 어렵다. 이준형은 평생 토지에 이름 한 번 올린 일이 없었 고, 평소 돈 만지는 것을 싫어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쌀값을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던 보수적인 선비였지 만, 하지만 돈을 쓸 곳에는 아끼지를 않았고, 아낄 때 는 철저히 아꼈던 사람으로, 아버지 석주는 사진이 한 장이라도 남아 있지만 이준형은 평생 사진 한 장 을 찍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상 석주의 망명일기 「서사록」 연재를 마치며 필 자는 이상룡 선생과, 그의 아들 이준형 선생, 그리고 손자 이병화 선생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의 영전 에 경건하게 향을 사르고 예를 갖춘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경제학 ·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 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를 맡고 있다.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에서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 익현 선생의 5대손이다. 필자 최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