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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동산 류인식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89 은 우리의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거나 꾸준히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다.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雲揚號) 의 불법침입으로 야기된 조(朝) · 일(日) 양국의 군사충 돌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 충돌의 책임을 우리 측에 씌워 무력으로 강압, 개항을 강요함으로써 그 결과 강화도조약(1876년)을 체결하고 정치적 · 경제적 세 력을 우리나라에 침투시켰다. 이어서 일본은 1904 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 간섭을 시작하였다. 한편, 1894년(고종 31년) 1월 동학농민봉기가 일 어나면서 나라가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이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항거하여 농민들 이 고부관아를 습격함으로써 발단되었다. 이 때, 조 정에서는 관군의 힘만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 다고 판단, 청(淸) 나라에 원군을 끌어들이면서 새로 운 비극이 시작되었다. 청 나라 군대가 파병되자 일 본이 천진조약(天津條約, 1885년)을 구실로 서울에 군대를 입성시키면서, 우리나라가 청(淸) · 일(日) 두 나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동학농민 군은 진압되었지만, 청 · 일 두 나라의 군대는 철수를 거부하였다. 우리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고래 싸 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 때, 일본은 청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 를 확보해가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 획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1894년 6월 21일에 일어난 갑오변란은 이러한 계획에서 출발한 사건이 었다. 일본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미우라 고오로(三 浦梧樓)를 공사(公使)로 조선에 파견하여 그로 하여 금 새로운 국면을 모색케 하였다. 미우라는 군인 출 신으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외교 경험은 전 무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에 부임한 후 1개월여를 칩거하면서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걸림돌인 ‘명성황 후(明成皇后) 제거’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8 월 20일(양력 10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일본 공사관에 관련자들을 불러 놓고 실행방안을 논의하 였다. 암호명 ‘여우사냥’ 작전이 개시되었다. 검객과 낭인들이 궁궐 뒷편의 황후 침실인 옥호루(玉毫樓) 로 난입하여 왕비를 참살하였다. 이를 을미사변(乙 未事變, 1895년)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불꽃처럼 일어 났다. 협동학교 교직원들. 가운데 왼쪽이 유인식, 뒷줄 왼쪽이 김동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