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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과(戰果)를 올리고 퇴각하였다. 그런데 21일 장대비가 내 리는 틈을 타 일본군은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석용 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화약이 젖어 적절한 대응을 하 지 못한 이석용 의진에서는 17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 다. 후일 이석용은 야음을 틈타 격전지의 가시덤불을 베 고 그곳에 단을 쌓은 뒤 자신을 따르다 순국한 의병의 영 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 개최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특별회의에서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 10여 명의 공 동 발기인 이름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전국 에 발송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는 국민의 힘으 로 국채를 갚고 일본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대구광문사와 대구광문회 주도로 1907년 2 월 21일 대구군 서문 밖의 북후정(北堠 亭)에서 대구군민대회를 열어 의연금을 모으기 시작했 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유생층과 상인층이 주도하였으나 군민대회를 거치면서 점차 부녀자와 하층 민들에게 확산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언론을 통하여 전국으로 퍼져갔다. 1908년 6월경까지 1년 4개 월여 진행되면서 약 26만 원의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였으나, 일제는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양기탁 등 지도적 인사에 대해 탄압을 가하고 기금을 가로챘다. 비록 일 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전 국민이 참여한 유례 없는 경제적 민족운동 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운현전적의혼 추모비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개최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