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page
88 2024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낙구 의병장의 후손은 끝내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당시 국가보훈처(현재 국가보훈부) 민족정기선양센터 공훈심사과 담당자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랬더니 담당자는 국가보훈처에서도 백 낙구 의병장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했다. 나는 다시 이전에 의병에 대해 자문을 받은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에게 문의했더니, 그분 역시 후손의 소 재를 모른다고 했다. 나는 작가로서 이런 분을 더욱 심층 취재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두 눈의 시력도 잃은 장애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누가 그분의 의로운 희생을 보상해 줄 것인가. 의병을 연 구한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일제에 치열하게 항쟁 한 분일수록 대가 끊어지거나 일가친척조차도 화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그 방법을 곰곰 생 각하다가 백낙구 의병장을 깊이 연구한 순천대학교 홍영기 교수와 대담으로 그분의 생애를 더듬기로 하 였다. 홍 교수에게 전화로 나의 이런 제의를 말씀 드 리자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부끄러움에서 출발한 의병 연구 그분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2007년 11월 5일) 이 른 아침, 숙소의 커튼을 걷자 날씨가 쾌청했다. 그날 일정을 잔뜩 기대하면서 짐을 쌌다. 그 흔한 내 차도 없으면서 노트북은 물론 스캐너까지 가방에 넣자 짐 이 만만치 않다. 임시로 정한 호남의병 답사 베이스 캠프인 전남 창평의 한 숙소를 출발한 뒤 주암휴게 소에서 아침을 들고 곧장 순천으로 향했다. 지리산 일대의 단풍이 절정이었다. 이런 금수강산을 지켜주 신 조상님이 얼마나 고마운가. 섬진강에 아침 햇살 이 비치자 더욱 눈이 부셨다. 약속 시간 10분 전인 10시 50분, 순천대 홍영기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렸 다. 당시 그분은 50대 초반임에도 10대 소년 마냥 수 줍은 기색에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우리를 위해 녹차를 끓이던 중이었다. 연구실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대담을 나눴다. - 역사 전공분야는 대단히 넓은데 왜 하필 호남의 병을 전공하셨습니까? “군에서 제대한 뒤 곧장 교사 발령을 보성 문덕중 1907년 8월 초 일제의 대한제국군 군대 해산 뒤 치열한 항쟁을 벌이다가 포로가 된 한국군 병사들 (출처 : 프랑스 잡지 『릴뤼스 트라시옹(L’illustration)』1907.9.7). 해산된 군인들의 합류로 의 병전쟁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릴뤼스트라시옹』 1907년 8월 10일자에 보도된 일본군의 의병 총살 장면(전남 담양, 조선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