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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 표로 회의에 참가하고, 1924년에 신숙, 김규식등과 함께 국민위원 회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 기도 하였다. 1925년 만주로 귀환한 지청천 장군은 길림주민회, 의성단, 광 정단, 통의부 등 독립운동 단체 를 통합하여 정의부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하 였다. 1928년 2월에는 정의부, 참의 부, 국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추 진하였으며, 단체본위와 개인본 위 통합론으로 분리되어 실패하 게 되자 지청천 장군은 전민족유 일당조직협의회에 참가하였다. 1930년 김좌진이 암살당하자 동년 7월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 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며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 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자유시 사변 유적지 러시아 스보보드니시(자유시)의 급수탑 1920년대 지청천 장군은 1888년 서울 종로에 서 태어났다. 호:백산(白山), 이명은 이청천(李靑天), 지대형(池大亨), 지용 기(池龍基). 1906년에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를 졸업하였으며, 1910년에는 일본 동경의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에는 일본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장교로 임관되어 복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 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결심하 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봉천성 유하현 합니하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에 임명되 어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 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 배출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독립전 쟁 이후 중·소 국경지대인 밀 산에 모인 북로군정서, 대한독 립군, 대한국민회, 의군부, 혈성 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이 대부대를 이끌고 소련령인 “이 만시”로 이동하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유적지 (화룡시 백운평 일대) 한국독립군 동경성 전투 유적지 (흑룡강성 발해진 동경성 서문)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유적지 전경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장군 86┃만주벌의 별이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