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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대성학교,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다 87 를 설립하여 대성학교 에서 양성한 졸업생들 을 교사로 삼아 지도하 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 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대성학교는 도산이 꿈 꾸었던 교육구국을 위 한 제1교요, 표본교였다 고 할 수 있었다. 이 때, 도산이 직접 학 생들의 훈육을 담당했 으며, 교무는 초기에 고등사범학교 출신 장응진(張膺 震)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의 훈육방침은 건 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었다. 건전한 인격이란 거짓이 없고, 성실한 행동이 그 중 심이었다. 도산은 훈화 시간에 언제나 “죽더라도 거 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고 강 조하였다. 또, 도산은 교내의 규칙을 까다롭게 세우 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 정한 규칙은 철저하 게 지키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칙을 지키는 것 이야 말로 학생된 제1의 조건이요, 의무로 강조하였 다. 이처럼 엄격한 교육을 받은 대성학교 학생들은 개교 1주년이 되었을 무렵, 휴가에 향리로 돌아가면 지역주민들로부터 놀람과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 다고 전한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제1회 배화학당 졸업생과 설립자 캠벨 여선교사 등 일행 안창호(1878~1938, 한국학중 앙연구원 제공) 1908년 경 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1915년 신축되고 1922년 증축된 배화여학교 건물(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