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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⑦ 87 왔다. 최익현은 ‘기병소(起兵疏)’ 를 올렸으니 곧 황제의 비답을 받게 될 터인즉, 일개 지방관찰 사가 간여할 바 가 아니라는 답 장을 보냈다. 하 지만 이때 이미 옥과와 금산에 관군과 일본군 이 출진하고 포 위망을 형성하 여 사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최익현은 그들을 맞아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척후병의 보고에 의해 그들 이 일본인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관군임이 판명되었다. 당시 의병들이 부딪힌 가장 어려운 점은 관군과의 접전이었다. 의로운 의진의 행군을 막는 자는 모두 일본인들의 앞잡이이므로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일 본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한국인이 한 국인을 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의병부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모두 흩어지고 22명 이 남아서 최익현을 호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군 의 공격은 끈질겼다. 1906년 4월 21일 새벽 최익현과 호위 유생 12인 이 남았는데,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이 때 이들은 경전을 돌아가며 외우고 있다가 체포되었 다. 22일 광주 일제 고문관의 심문이 있었고, 23일 전주 진위대와 일본군 병사에 의해 서울로 압송 되었 다. 최익현 일행은 서울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에 갇 혀 1906년 6월 26일 형을 받게 되었다. 최익현은 감 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형을 받고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06년 11월 17일, 최익현은 74세의 노령으로 대 마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2 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 념하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 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 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 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 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 채용신이 1930년대에 그린 최익현 대마도 유배도(충청남도 제공) 대마도 수선사(修善寺) 경내에 세워진 최익현 순국비(독립기념관 제공 ). 왼쪽 기념비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 之碑)’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