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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⑥ 87 에서 대학을 다닐 때 연탄배달 로 번 돈을 모아 세운 비라고 하 여 더욱 가슴 뭉클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심남일 의병장의 행장을 아래 에 소개한다. [심남일 의병장 행장] 심남일 본명은 수택(守澤), 자 는 덕홍(德弘), 호는 남일(南一) 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그는 1871년 2월 10일(음력) 전 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 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사서삼경에 능 통하였으나 관직에 나간 기록은 없고 서당 훈장과 향교 교임을 맡은 유생이었다. 러일전쟁 후 일제 침략이 노골화 되고, 1905년 을 사늑약이 체결되자 통분을 금할 길 없어 거의할 것 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아우 율 (聿)의 부장이 되어 장성·영광·함평·남원· 보성·장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 율이 전사하자 후임 의병장으로 군율을 더욱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심 의병장은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만든 뒤 이를 철저히 지키도 록 교육하였다. 그 요지는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거 나, 부녀자를 겁간하든지, 가축을 희생시키는 일 등 에 대하여 엄히 처단할 것을 밝혔다. “원컨대 제군들은 특히 백성을 무마하는 데 힘써 야 한다. 부디 토지와 재물을 빼앗지 말고, 겁략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때리지 말라. 그리고 경 솔하게 군사를 발동치 말고, 적을 가소롭게 보 지 말 라.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집안사람 맞이하듯 반갑 게 서로 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 심남일 의병부대의 투쟁사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 에서 깃발을 올려 의병을 모집, 훈련하기 시작하였 다. 첫 접전은 1908년 3월 7일 강진면 오치동에서 있 었다. 적병 수백 명을 맞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경 까지의 교전 끝에 적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 수 노획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해 4월 15일 장흥·곽암에서, 6월 19일 남평 장 담원에서, 6월 25일 능주 노구두에서 적 다수를 살 상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7월 30일 영암 사 촌 전투에서, 8월 1일 나주 반치에서, 9월 20일 장 흥 신풍에서, 10월 9일 해남 성내에서, 10월 27일 능 주 돌정 등지에서 적 다수를 살상하였다. 이와 같은 1909년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들(독립기 념관 제공).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 오성술 · 이강산 · 모천년 · 강무경 · 이영준. 뒷줄 왼쪽부 터 황두일 · 김원국 · 양진여 · 심남일 · 조규문 · 안규홍(일명 안계홍) · 김병철 · 강사문 · 박사 화 · 나성화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