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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생각하는 역사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년 그 활동과 성과』 서평 87 한 인사들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게 된다. 임정의 품 안에서 태어났고 성장한 ‘임정 의 아들’ 김자동(金滋東) 선생이 초대 회장을 맡은 이 사업회는 자신이 지난 20년 동안 벌였던 활동과 그 성과를 위의 책에서 자세 히 기록했다. 기존의 임정 연구에 관한 중요 한 추가라고 평할 수 있다. 방대한 이 책을 통독하면,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본국을 떠나 임정에 참여 한 인사들은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굶 주림과 헐벗음은 일상의 일이었고, 생명의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흔했다. 장제 스(蔣介石)의 국민당정부가 베푼 호의로 목 선(木船)을 겨우 얻어 수십 명이 탄 채 강을 건널 때, 어느 지점에서는 목선에서 내려 사람들이 밀어야 했 던 사례는 그 어려웠던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온갖 역경을 견뎌내게 한 것은 오로지 하나, 조국 의 광복을 위한 소망과 열정이었다. 이 정신력으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임정의 간판을 들고 싸운 발자 취를 우리는 이 책에서 다시 보면서, 존경과 감사의 뜻을 거듭 표시하게 된다. 「분단 최초 재북 애국지사 묘역 방북 성묘」 부분 눈길 필자가 더 자세히 알게 되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 부분인 「제5부 분단 최초 재북 애국지사 묘역 방북 성묘」(293~398쪽)에 관해 부연하고자 한다. 문제의 발단은 북한정권이 6 · 25전쟁을 일으켜 남 한을 강점한 뒤, 항일독립운동에, 특히 임정에 참여 했던 애국자들을 납북한 비인도적 처사였다. 임정 부주석이었던 김규식,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 윤기섭, 임정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 임정 법무부장이었 던 최동오, 임정 내무부장이었던 조완구, 임정 선전부장 이었던 엄항섭, 임정 문화부장이었던 김상덕,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이었던 김의한과 류동렬, 임정 청년 외교단원이었던 안재홍, 그리고 임정 자금조달책이 었던 장현식 선생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었다. 그러면 북한정권은 왜 임시정부 요인들을 납북했 던가? 북한정권은 애초 임정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 려 매도했다. ‘유랑민들의 모임’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임정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정치적 상징성을 경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북한정권은 임 정 요인들을 납북해 평양에 머물며 활동하게 하는 외 양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높이는 데 활 용하고자 한 것이다. 납치되어 자유를 제한받았지만, 임정 요인들은 북한정권의 뜻에 맞게 언동하지 않으 면서 지조를 지켰다. 몸은 비록 잡혀있었으나 조국의 평화통일이라는 그들의 염원은 변하지 않았다. ➊ 2006년 10월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 아버지(김의한)묘비 앞에 선 김 자동 회장 부부. 묘비 앞에 남에서 가져간 어머니 사진이 놓여있다(오마이뉴스 제공). ➋ 신미리 애국렬사릉 ➌ 대성산 혁명렬사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❶ ➋ 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