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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③ 87 왕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가 유래된 인물 이 아니던가. 소랑과 구천은 먹을 것 하나 없고 땔감 하나 없는 석주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다. 당시 항도천에는 참판 홍승헌(洪承憲), 참판 정원 하(鄭元夏) 등 대한제국 고위직 출신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먼저 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석주를 기다리고 있 었다. 석주의 손위 처남인 김대락은 나라가 망한 경 술(1910)년 12월에 만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망명길 에 올랐던 인물이다. 김대락은 식민지 땅에서 후손을 볼 수 없다고 만삭 의 손주며느리까지 동행하여 국경을 넘어갔다. 석주 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는 마침 이 손주 며느리가 해 산을 했다. 춥고 배고픈 땅에서 맞이하는 경사가 아 닐 수 없었다. 이제 석주의 일기를 따라가 보자. 27일 강의 북쪽 기슭은 곧 안동현(安東縣)으로 옛날에는 사하자(沙河子)라고 불렀다. 1876년(고종 13)에 새로 관리를 파견하여 세관을 설치하고 강을 따 라 실어내는 목재에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그 권리를 거의 일본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5리쯤 가서 동취잔 (東聚棧)에 이르니, 김택준(金宅駿)과 이준선(李俊善)이 반갑게 맞이하며 앞장을 선다. 회랑을 끼고 돌아 북쪽 으로 가 이윤수(李允秀)의 객점에 숙소를 정하였다. 질부(姪婦)가 풍한(風寒)에 상하여 이불을 두르고 잠시 자리에 기대고 있는데, 주인 노파가 급히 들어 와 일어나기를 청한다. 잠시 뒤에 일본 순사 2명이 들 어 왔다. 대개 봉천 등지에 흑사병이 있은 이래로 날 마다 조사하는데, 만일 누워 앓는 사람이 있으면 곧 바로 데리고 가서 검역한다고 한다. 28일 그곳에서 유숙하다가 담흑색의 흙덩어리 를 보았는데, 바짝 마른 정방형이 마치 벽돌과 같다. 뜰 안에 가득 쌓아 두었는데 무엇인지 물어보니 곧 토탄(土炭)이라고 한다. 요양(遼陽)과 금주(金州) 등지 에서 생산되는 물건으로 배로 실어 와서 구들을 데우 는 데 쓴다고 한다. 오후에 중국인(청나라 사람)의 서 점에서 『만주지리지(滿州地理誌)』를 샀다. 29일 마차 두 대를 샀다. 마차는 크고 작은 두 등급이 있어, 큰 것은 말 예닐곱 마리가 끌어 2천 근 을 실을 수 있고, 작은 것은 말 너댓 마리가 끌어 1천 여 근을 싣는다. 내가 산 것은 다만 말 세 마리가 끄는 것으로 겨우 서너 사람을 태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한림거(翰林車)라 불렀다. 아침 먹은 뒤에 출발하였는데, 도로가 울퉁불퉁한 곳에서는 수레가 많이 흔들리어 앉음새가 편안치 못 하다가 오직 얼음을 건너갈 때만 조금 평온하여 행로 가 빠르다. 80리를 가서 소포천(小蒲川)의 풍가점(馮 家店)에 이르렀다. 직예성(直隸省)에 사는 이씨(李氏) 는 순실하고 근후한 됨됨이에 자못 유식하다. 저녁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이 쓰기 위해 만든 검. 2,500여 년이  지난 현재도 녹이 슬지 않은 원형을 유지한 청동검으로 지금도 쓸  수 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제공). 이상룡은 와신상담의 고사를 상 기하며 만주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