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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60연대의 보병 2개중대와 기병 반개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소대를 파견하여 홍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5월 30일 밤부터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홍주 의병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결국 참모장 채광묵(蔡 光默)을 비롯하여 성재평·전태진·서기환·전경호 등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홍주성전투 직후 홍 주군수로 부임한 윤시영(尹始永)의 일기에 의하면, 일 본기마병이 의병을 추격 사살하였으며, 체포된 의병을 심지어는 ‘작살’하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1949년 홍주경찰서와 소방서원들의 식목 행사 중, 홍성천 주변에서 유해가 발굴되어 묘역을 조성 하였다. 의병총은 2001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사적 제431호로 지정되어 묘역 일대를 성역화하였다. 김좌진 장군 생가 서산 간월도와 안면도로 가는 들머리인 홍성나들목 을 나가면 왼쪽으로 김좌진 생가와 한용운 생가를 가 리키는 이정표가 나란히 서있다. 이를 따라 들어가면 작은 다리 건너편으로 커다란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 온다. 김좌진 생가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백야기념관>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백야 김좌진 장 군의 인생여정과 청산리 전투에 대해 소상하게 전시 되어 있다. 전투 당시의 전황도를 비롯해 전투에서 사용되었던 화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백야기념관 왼쪽의 조촐한 기와집이 실제로 김좌진이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생가다. 생가 터는 일제에 의해 모두 망가지고 심지어 그의 기운을 뺏기 위해 집터 뒤의 산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겪게 된다. 광복 후에도 30여 년간을 흔적으로만 남아있다가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 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였고, 백야기념관도 건립하였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곡간채, 헛간채 등 4채의 가옥만 복원되어 있지만 실제는 80여칸이 넘는 대가였다고 전해진다. 광주학생항쟁 시위지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한·일 학생간에 집단 난투가 벌어졌다. 이때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평소 민족차별교육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와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교로 진출 300여 명의 희생자들이 잠들어있는 홍주의사총 김좌진 장군 생가. 오른쪽에 백야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