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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024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이어 오성술 의병장과 의형제를 맺어온 김태원 의병 장도 그해 4월 광주 어등산전투에서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오성술 의병장은 이때부터 의병부대를 더욱 소규모로 나누어, 다른 부대와 수시로 이합집산하며 일제 군경을 교란하였다. 이는 한층 더 강화된 일제 군경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로서 많은 전 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오성술 의병부대는 전해 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 와도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단독 또는 연합전선으로 대일 항전을 펼쳐나갔다. 1908년 7월, 오성술 의병부대는 전해산 부대와 연 합하여 광산군 미량면 석문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 워 승리했고, 그해 10월 함평 대명동 전투에서도 일 본군 7명을 사살하고 숱한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도 올렸다. 오성술 의병부대는 일제 밀정 처단에도 주 력했다. 1908년 12월에는 나주군 이노면(현, 노안 면) 신기촌에서 밀정 황 아무개를, 이듬해 2월에는 나주군 신촌면 곡룡동에서 밀정 나 아무개를 잡아 처단하기도 했다. 1909년 1월 1일 새벽 오성술 의병부대는 전해산 부대와 연합으로 고막원 일제 헌병분파소를 습격하 여 헌병 보조원 2명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 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의병부대는 일제 군경의 예봉을 피해 나주 문평의 용문산, 광주 의 용진산으로 근거지를 수시로 옮기면서 끈질긴 대 일 항전을 펼쳐나갔다. 어찌 친척들까지 고생시킬 수 있겠는가? 1909년 3월초, 호남 의병장들은 심남일 의병장 주 선으로 전략회의를 가졌다. 일제 군경의 의병 토벌 작전에 맞서는 합동작전을 벌이고자 하는 모임이었 다. 이 작전에 따라 그 해 3월 8일, 나주군 남평면 거 성동에서 오성술 의병부대는 심남일 의병부대와 합 동작전을 벌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무렵의 일화를 이태룡 지음 『의병 찾 아가는 길』2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봄이 되자 본진을 용진산에서 영사재로 또 옮겨야 만 했다. 점점 노골화되는 일제의 감시와 부왜인(附 倭人, 밀정)들의 눈초리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데다가 부친으로부터의 군자금이 고갈되어 군 량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오 대장은 마침내 좌익장 오성범에게 자신의 친척집을 찾아가서 군량을 헌납 케 했다. 며칠 후, 오성범이 돌아와 보고하기를,‘군량을 헌 납할 마음은 있으나 밀고가 두려워 자진 헌납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를 들은 오 대장은 의 병들을 이끌고 마을에 도착한 다음 족장(族長, 집안 어른)들을 묶게 하고,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목숨을 바 쳐 싸우는 의병들에게 대접이 이렇게 소홀한가?” 이를 지켜본 족친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항의하려 하자, 다짜고짜 다가가서 뺨을 후려친 다음, 당장이 라도 요절을 낼 것 같은 행동에 모두 놀라고 말았다. 군량을 확보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장들이 의아해 하 였다. “어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어선 우리가 하물며 내 혈족을 아끼지 않으랴! 우리 가족들이야 왜놈들의 핍박을 받고 있지만 어찌 친척들까지 고생시킬 수 있 겠는가? 그래서 강제로 빼앗아 온 것처럼 한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