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page
86 2024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수 · 이갑 · 이승훈 · 안태국 · 이동녕 · 이시영 · 신채호 · 류동 열 · 김구 등이 참여했다. 이 때가 1907년(고종 44년) 4월이었다. 신민회는 ‘새로운 국민 · 새로운 민족으로 다시 태 어나자는 뜻의 신민(新民)의 꿈’을 잉태하고 출발했 는데(안천 지음, 『신흥무관학교』 중에서), 이 때 회원 은 ‘믿을 사람’, ‘애국 헌신할 결의가 있는 사람’, ‘단 결의 신의에 복종할 사람’에 한해서 자격이 인정되 었다. 특히, 회원의 입회절차는 대단히 엄격하였으 며, 누가 회원인지 비밀에 붙여졌다. 이 때, 양기탁이 총감독을, 이동녕이 총서기를 맡 았으며, 각도에 총감(摠監)을 두어 회원을 관리하였 다. 또, 산하의 단체로 청년학우회를 두었는데, 윤치 호가 중앙위원장을, 최남선이 중앙충무를 맡았다. 신민회의 창립목표는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여 자 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심에 청년 들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실력양성이었으므로, 신민회가 앞장서서 전국 각지 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항일의 선두에서 투쟁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었다. 이를 위해서, 도산 안창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나 라가 없고서 일가(一家)와 일신(一身)이 있을 수 없 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 있겠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켜 2천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건전한 인격인이 되고, …… 이 민족이 영광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강연에 많은 사람 이 감동을 받았다. 이로써, 정주(定州)의 오산학교(이승훈), 강화의 보 창학교(이동휘), 안동(安東)의 협동학교(協東學校, 이 상룡 · 류인식 · 금동삼), 안주의 협성안흥학교(協成安 興學校, 신민회),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신민회), 서울의 협성학교(신민회) 등이 세워졌다. 오산학교에 뒤이어, 도산이 스스로 평안남도 평양 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때가 1908년(순종 1 년) 9월 26일이었다. 대성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이었 지만, 내면적으로는 소정의 학과(學課) 이외에 인격 의 함양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교육방침으로 삼고 있 었다. 그리고, 도산은 전국 각 도의 각 군에 보통학교 아펜젤러가 1898년에 촬영한 이화학당 전경 (가운데 건물) 아펜젤러가 1895년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촬영한 사진(이상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젊은 시절의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