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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024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우·최복석은 29일 정오 무렵 갈산리에 모였다가 군 하리 공자묘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에서 만세운 동을 벌였다. 만세운동은 4월에도 이어져 덕적도의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는 4월 9일 학교 운동회에서 이재 관·차경창 등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이처럼 김포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의 전국적인 만 세운동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김포지역 만세운동에 서 여성으로 서훈을 받은 이는 이살눔 지사가 유일 하다. 푸른언덕 교회 조화자 전도사는 이살눔 지사 가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주동자로 참여했다고 단호 히 말했다. 그는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 기를 나눠주며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서다 일본 경찰 에 잡혔다. 그해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 를 치 르던 중 1919년 10월 27일 중병으로 가석방되었다. 1919년 10월 고문 후유증으로 가석방 당시에는 옥중 고문이 심했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 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는데, 일제는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사망’을 피하려고 가석방을 시켰다. 수원의 이선경 지사 (1902~1921)의 경우도 거의 죽음에 이르는 고문으로 가석방 되자마자 순국 의 길을 걸은 예에서 알 수 있다. 다행히 이살눔 지 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 된 이후 몸을 추슬러 고향 김포로 다시 내려갈 수 있었다. 군하리로 돌아 온 그는 교회를 개척하여 여전도사로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친혈육은 없고 양자를 들였는데 양아들 유 씨와 며느리마저 몇 해 전 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살눔 지사는 1948년 8월 13일에 62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어수선한 해방공간에서 무덤 을 미처 챙기지 못해 기념비만 남은 상태다. 정부에 서는 뒤늦게 고인의 공훈을 기려 숨진 지 44년 만인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포시에서는 이살눔 가출옥증표. 1919년 10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중병에 걸리자 일제는 옥중 사망을 피하려고 가출 옥 시켰다.  ‘이경덕 전도사 3.1운동기념비’ 앞의 필자. 기념비를 발견하고 마 치 이살눔(이경덕) 지사를 뵌 듯 감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