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page
86 2024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케 하여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擧義)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태인과 순창을 중심으로 전 개되었다. 그의 부름에 호응한 인물은 이정규(李正 奎) · 김태원(金泰元) · 조재학(曺在學) · 이양호(李養浩) 등이었다. 기우만(奇宇萬)과도 만나 거사를 상의하기 도 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문인들을 중심으로 「동맹록(同盟錄)」을 만들 게 하니 4월 10일 113명에 이르렀다. 1906년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를 열어 당일에 80명의 호응을 얻고, 각지 에서 군사를 모으며 무기를 준비하였다. 창의(倡義) 에 앞서 민영규(閔泳奎)를 통해 황제에게 의병을 일 으킨다는‘기병소(起兵疏)’를 올려 그 목적을 천명하 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오를 갖추고 4월 13일 태인 읍으로 들어가니 군수는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쉽사 리 태인을 접수하였다. 1906년 4월 14일 정읍으로 진군하니 군수가 의 병을 맞이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무장을 강화하고 의병을 모집한다는 방을 붙여 100여 명의 장정이 증 원되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내장사에 유진(留陣)하 니,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많은 포수들이 호응 하여, 의진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06년 4월 15일 구암사를 거쳐 16일 순창읍으 로 들어갔다. 17일 곡성읍으로 머물다가 18일 중진 원을 지나 남원으로 진군하려는 데, 남원은 이미 방 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길을 돌려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그러는 동안 의병부대는 600 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전주의 관찰사와 순창 군 수가 일본군을 동원하여 습격해 왔다. 1906년 4월 19일 새벽, 최익현은 임병찬에게 명 하여 접전케 하였으나, 길이 어긋나 교전은 없었다. 얼마 후 순창 군수가 최익현을 찾아왔다. 최익현은 그의 목을 베고자 했으나, 임병찬의 만류로 중지하 고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 사이에도 사방에서 애국 청년들이 몰려와 군사의 수는 800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무장을 갖춘 사람은 200여 명에 불과했다. 1906년 4월 20일 새벽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칙지(勅旨)와 고시문을 보내 최익현 영정이 봉안된 영당(影堂). ‘성충대의’현판이 걸려있다 (충남 청양군 모덕사 경내, 필자 촬영). 모덕사 경내 영당에 봉안된 최익현 영정(모덕사 제공) 최익현의 의로운 행적을 기념하 는 ‘면암 최익현 선생 춘추대의비(春 秋大義碑)’(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 음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