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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갑신정변, ‘삼일천하’로 끝나다 85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었고, 군란이 평정되었지만 그 들은 군대를 철수하지 아니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 을 주장하였다. 한편,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발생한 일본측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우리 조정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를 계기로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과 근대화를 꿈꾸던 급진개화파들에게 있어서는 큰 자 극이 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던 김옥 균은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개혁하고, 옥죄어오고 있 는 세계열강들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애국심 을 가진 혁명가였다. 김옥균과 뜻을 같이 했던 박영 효 · 홍영식 · 서광범 · 서재필도 앞을 내다본 선지자들 이었다. 그러하다면, 갑신정변이 성공했더라면 조선은 어 떠한 나라로 발전했을까? 김옥균은 1881년(고종 18 년) 4월 10일 홍영식과 함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행정기관을 시찰 · 조사하는 임 무를 수행했다. 이 때 일본이 1868년(고종 5년) 메이 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서 서구의 선진한 문물을 수 용함으로써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접하면 서 시대의 변하는 모습에 크게 자극을 받았던 것으 로 보인다. 1884년,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서 김옥균 등 개화 파들이 계획했던 갑신정변이 성공하고 혁신정부에 의해서 개혁정책이 펼쳐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 져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심전 안중식(1861~1919)이 1883년에 그린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숭실대박물관 소장). 왼쪽 끝이 홍영식, 오른쪽 끝이 민영 익, 앞줄 왼쪽 끝이 다케조에 일본공사, 윗줄 왼쪽은 당시 외교 고문 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 가운데가 김옥균이다. 19세기 말의 제물포항 전경(김이경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