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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대성학교,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다 85 한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한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됨 으로써 관립학교의 한계를 메울 수 있었다. 1885년 (고종 22년) 8월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Appenzeller, H. G.)가 2명의 학생을 가르친 것을 그 시작으로 한 배재학당(培材學堂)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은 1886년(고종 23년)에 고종 (高宗)이 하사했는데, 이것이 현재 배재중 · 고등학교 의 전신이다. 또, 스크랜턴(Scranton, M. F.) 부인이 1886년 지 금의 중구 정동에서 1명의 여학생을 가르치면서 시 작된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여성교육 기관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이화학당은 1908년(순 종 2년)에 초 · 중 · 고등과의 학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1910년(순종 4년)에는 4년제 대학과정을 설치하여 1914년 4월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것이 현재 의 이화여자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절 실해졌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거치면서 국정개혁에 있어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인재의 양성이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1895년 (고종 32년) 2월 교육입국조서(詔書)를 반포하고, 정 부에서 각급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895년, 정부가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하는 것 을 시 작으로 하여 각종 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를 이어 미북장로회가 숭실학교(1897년), 미남감리회가 배화여학교(1898년), 민영환이 흥화학교(1898년), 안창호가 점진학교(1899년)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5년(고종 42년) 11월 17일 일본에 의 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일명 을사5조약)이 체결되면 서 외교권이 박탈되고, 나라는 국제적 지위를 잃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일본의 한국통 감부(韓國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 이 노골화되었다. 이로써, 나라의 사정은 참으로 암 울하였다. 안창호, 대성학교를 설립하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이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판 단하였다. 이 무렵에 도산(島山)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과의 만남을 가 지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단체의 필요성을 교감 하고 신민회를 창립했다. 이 때 이회영 · 전덕기 · 주진 배재학당 현판. 1886년 고종(1852~1919)이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의미로 학교명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짓고, 명필  정 학교에게 쓰게 해 하사한 것이다. 배재학당의 첫 교사(校舍, 오른쪽)였다가 소실된 본관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뉴시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