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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통진장날 만세운동을 이끈 성서학교 만학도 ‘이살눔’ 85 습니다. 그러한 활동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 게 되자 누산교회 박흥규 목사님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실 만이 라도 기념비를 세워 기려야한다고 해서 세운 게 이 기념비입니다 .” 조화자 전도사는 이살눔 지사에 대해 박흥규 목사 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박흥규 목사님도 돌아가셨다면서 김포지역의 독립 운동사를 정리한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놓는다. 《김포 항일독립운동사》(김포문화원, 2005) 책에는 이살눔 지사를 포함한 김포 월곶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지 사들의 기록이 낱낱이 적혀있다. 3월 22일 김포 통진장날 시위 주도 1919년은 이살눔 지사가 33살이 되던 해였다. 결 코 여자 나이로 적은 나이가 아닌 이 무렵 이살눔 지 사는 성서학교(聖書學校) 재학생이었다. 신앙심이 깊 었던 그녀는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3월, 김 포에도 만세운동의 물결이 밀어닥칠 것을 예견했다. 3월 22일 오후 2시 이날은 통진 장날이었다. 이살 눔 지사는 군하리 출신 박용희 · 성태영 · 백일환 등과 군 중을 이끌어 면사무소, 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으 로 유도했다. 이에 앞서 임용우 · 윤영규 · 조남윤 · 최 우석 · 이병린 등의 주도로 장터에 있던 약 200여 명 의 군중들은 만세시위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만세 운동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일행은 면사무소와 주재소 등지를 돌며 이곳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항의 했고, 일부 한국인 순사보들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김포의 만세운동은 3월 29일에 또다시 일어났다. 조남윤은 당인표 등과 함께 “29일 오전 11시에 통진 읍내에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는 취지의 문서 7통을 작성한 다음 이를 면내 각 동리 주민에게 배포하였다. 이날 오전 11시쯤 마을주민 40여 명이 읍내에 모이자, 이들을 지휘하여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앞서 28일 밤 정인교·윤종근·민창식은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 인근 함반산 (含飯山) 꼭대 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월곶면의 임용 푸른언덕 교회 입구 왼쪽 파라솔 뒤에 기념비가 있다(필자 촬영).  이살눔(이경덕) 지사(한국화가 이무성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