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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⑦ 85 직생활을 시작했으나, 재임 중 면암은 꾸준히 부정 부패와 구국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계열의 위정척사(衛正 斥邪)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 로 하였다. 최익현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는 1868 년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 중단과 원납전 철폐, 당백 전을 폐할 것 등을 상소한 시폐4조(時弊四條)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대원군을 하야시킬 수 있었으 나, 그 역시 유배당하여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귀양 살이를 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상소 를 통한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미 1875년 개항에 반대하여 이른바 '오불가척화의소 (五不可斥和議疏 일명 도끼상소)'를 상소한 바 있지 만, 1906년까지 줄곧 30편의 상소를 올려 시종일관 위정척사 사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말년에까지 그대로 이어졌 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꺾일 우려가 있는 관직생활 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심지어 최익현의 상소 에 따 라 실각했던 대원군이 1894년 재집권하게 되었을 때, 개항에 대해 같은 견해를 표명한 그를 공조판서 에 제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 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부에서는 그들에게 영 향력이 큰 면암을 선유대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응하 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광무황제)이 다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렀으나 응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날로 기울어 가는 국 운을 그대로 볼 수만 없어 고종을 알현했지만, 별다 른 방책이 없이 일제에 의해 2차례나 감금된 상태에 서 결국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1906년 2월 최익현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 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여 러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함께 국난을 타개할 것 을 호소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문하생 최 제학(崔濟學)을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과 연락 1906년 4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최익현(독립기념관 제공) 1906년 봉기한 최익현 의병부대의 의병항쟁을 기념하는 ‘병오창의   기적비’. 전북 정읍시 무성서원에 있다(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