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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석오 이동녕, 신흥무관학교에 꿈을 심다 85 와 경상도 안동의 김대락(金大洛) · 이상룡 · 김동삼 등 과 만주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인거 류민(韓人居留民)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 직하고,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을 위한 첫발을 떼어놓 았다. 이 때가 1911년 4월이었다. 그리고, 이들 망명동지들은 같은 해 6월 10일 이 곳 한인촌(韓人村)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新 興講習所)의 문을 열었다. 여기 ‘신흥’이란 명칭은 신 민회의 ‘신’(新)과 나라를 일으킨다는 ‘흥’(興)을 조합 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석오가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 신흥강습소가 뒷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 다. 1912년 7월 20일, 남만주 류하현 삼원보에서 남 쪽으로 40여 km 떨어진 통화현(通化縣) 신안보(新安 堡)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하여 연병장과 내무반 · 교 실 · 교무실 등의 교육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이 꿈에도 그리던 ‘신흥무관학교’이다. 이 때, 신흥무관학교의 건립은 애국지사들의 헌신 적인 노력과 재정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지만, 특히 숨은 공로자는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李石榮)으 로 알려졌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 을 흔쾌히 쾌척하였으며, 또 학생들의 침식을 제공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건립된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의 터전 이 되었는데, 오광선(吳光鮮) · 신팔균(申八均) · 이범석 (李範奭) · 김경천(金擎天) 등이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0년 8월 폐교할 때까지 3,500여 명의 졸 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 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소규모의 한인촌에 소학교나 노동강습소를 세우고, 한인 (韓人) 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계몽활동을 펴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훗날 신안보 합니하에서 신흥학우단 을 조직하여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고 하니, 석오를 비롯한 망명지사들이 뿌린 신 흥무관학교의 씨앗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석오는 1919년 4월 10일 중국 남방의 상해(上 海)에서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그 의장에 취 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하 였다. 그 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을 맡아서 조국광 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쳤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이동녕의 친필(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