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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② 85 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과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 의하고 의병을 모으고자 떠난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래 도 고광순은 좌절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12월 11일(양력 1907년 1월 24일) 고광순은 고제 량과 더불어 창평 저산에서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유격전술을 써서 조석으로 변장 하고, 어제 동쪽을 쳤다면 오늘은 서쪽을 치고, 밤낮 으로 진지를 바꾸는가 하면, 구름과 같이 모였다 흩 어지며, 치고 빠지기를 번개같이 했다. 이 바람에 일 본군들은 이러한 유격전에 시달리고 지친 끝에 아예 고광순 부대의 뿌리를 뽑아버릴 요량으로 녹천 본가 에 불을 질러버렸다. 고광순은 본가가 불타고 벙어리 아들 재환이 일군 의 칼에 마구 찔리고 가솔이 오갈 데 없이 되었다는 소식에 더욱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태극도안 위에 “불원복(不遠復: 머잖 아 광복이 된다)”이라는 세 글자를 크고 단정하게 써 넣은 ‘불원복’기를 고안하여 군기로 사용하였다. 장 졸들은 아침저녁으로 이 국기 겸 군기에 절하면서 국권회복 을 염원하며 죽기를 맹세하고 싸웠다. 녹천 의병부대는 전남 능주 의 양회일 의병부대와 담양 이 항선, 장성 기삼연 의병부대 등과 제휴하여 게릴라 연합전 술로 능주와 동복을 공략하는 등, 인근 고을을 넘나들며 기 습을 거듭해 보았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비정규 군에다 빈약한 무기와 부족한 군량 등 악조건으로 는 최신의 무기를 갖춘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기 는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관군과 일본군들이 의병 의 근거지를 겨냥하고 차츰차츰 죄어 들어오는 기미 가 보이자, 마침내 고광순은 전략을 바꾸어 지리산 의 심산유곡으로 본진을 옮기고 일본군을 그곳으로 유인할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고광순은 월봉산 국수봉을 향하여 신명 께 고유제를 올리고 진용을 다시 정비하여 자신은 도독(都督)이 되고, 고제량은 도총, 박성덕은 선봉장, 윤영기 · 신덕균을 참모로 삼아 이튿날 지리산을 향해 고광순 의병부대가 사용한 ‘불원복’기(독립기념관 제공) 1909년 일제의 소위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의병장들(1909.12,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