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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매국의 앞잡이, 을사오적 85 했다. 이로써, 이 른바 고문정치(顧 問政治)가 시작되 었고, 일본은 조선 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였다. 이렇 게 정지작업을 마 무리한 일본은 제2 차 한일협약(이른 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 속도를 더해갔다. 일본 은 이를 위해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체결하면서, 미국의 양 해 아래 조선을 요리하려는 공작을 마무리하였다. 이 것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와 일본의 조선에 대 한 지배를 나누어 차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로써,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보호조약’의 체결에 미국 의 간섭을 배제하는 보장을 얻어낸 것이다. 10월 27 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보호권확립을 위한 각의(閣 議)를 거치면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11월 2 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조약체결의 밀명을 받고 조선에 왔다. 1905년 11월, 당시 우리의 사정은 어떠했던가. 의 정부에는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외부대신 박제순 (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 (李根澤),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 (李完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었다. 11월 17일 오후 3시, 특명전권대사 이또오가 지휘 하는 일본군으로 포위된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유와 협박에 의한 공포 분위 기 속에서 열린 어전회의는 오후 8시가 지나도 록 끝 나지 않았다. 이 때, 대신들의 행적은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조약체결에 적극적 으로 반대한 대신은 한규설과 민영기였으며, 이하영 이 대체로 반대의 의견을 개진했던 것으로 알려졌 다. 박제순 · 이지용 · 이근택 · 이완용 · 권중현, 이들은 어 느 나라의 대신들이었던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 게 전가하면서 찬성의 의견을 냈다. 이들 ‘을사오적(乙巳五賊)’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의 길’에 앞장선 것이다.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상 위키피디아 제공)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