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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4년 1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사를 이끌고 정변의 진압에 나섰다. 궐내(闕內)에 있 는 1개 중대의 일본군은 청나라의 군대를 맞아 싸우 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정변이 성공했더라면? 이때,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일본 군대의 수적인 열세를 알고, 개화파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철병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 했다가 서대문을 통해 양화진(楊花津) ·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것이 김옥균이 믿고 도움을 받으려했던 일본의 행태였다. 이로써, 개화 파의 혁신정부는 개혁정치를 실현해보지도 못한 채 3일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이른바 ‘갑신정변의 3일천하’이다. 이때, 개화파의 실패는 개혁정책을 지지할 민중 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으며, 일본 군 대가 약속을 어기고 철병함으로써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홍영식은 청 나라 군대에 참 살되었으며, 김옥균 · 박영효 · 서 광범 ·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 명하였다. 이들 중 김옥균만 일 본에 남고, 박영효 · 서광범 · 서 재필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조정에서는 김옥균 · 박영 효 · 홍영식 · 서광범 · 서재필을 ‘갑신오적’(甲申五賊)으로 규정 했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 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로 되돌아가보자. 이때, 개화파 에 의한 혁신정부가 표방한 개혁정책은 청나라에 납 치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조속히 송환하고, 청나라 에 대한 조공과 문벌을 폐지하며 능력에 따른 관리 의 등용‧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들의 부정 과 부패를 근절하는 것 등을 담고 있었다. 이 개혁정 책은 당시에 나라가 처해 있던 대내외적 상황에 비 추어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미국 · 영국 · 이탈리아 · 프랑 스 · 러시아 등 세계열강들이 우리 조정을 옥죄어오고 있었으며, 더욱 급박한 것은 청 · 일 두 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러한 상황에서 부패한 관료사회는 민생을 돌보지 않 고 있어서 민중들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나라 안팎의 사정은 개 화사상을 가진 젊은 정치인들의 개혁의 대상으로 떠 올랐다. 더욱이, 이들 개화사상을 가진 정치인들을 자극한 것은 1882년(고종 19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청 임오군란 후 조선에 주둔하며 내정간섭을 일삼은 위안스카이(조선일보 제공) 조선주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노년기 모습(국제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