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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4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던 곳이 아닌가. 밤잠을 설친 데다 여기서부터 보병 학교까지 구보로 뛰어갔던, 힘들었던 보병학교 생활 첫 출발지였다. 하지만 이곳 일대도 그때 모습을 찾 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오성술 의병장 행장 오성술 의병장은 1884년 전남 광산군(현재 광주 광역시) 삼도면 송산리 죽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 관은 나주로 본명은 인수(仁洙), 자를 성술(成述), 호 를 죽파(竹坡)라 하였다. 참봉이었던 아버지 오영선 (吳榮善)은 마을에서 상당한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분으로, 외아들 오성술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 다. 그는 여덟 살 때 후송(後松) 양상하(梁相賀)에게 학문을 배우고, 18세 때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이 강학하던 용진정사에서 경학과 도학을 공부하였 다. 1905년 21세에 참봉을 제수 받은 뒤 ‘오참봉’으 로 불렸고, 뒷날 그의 의병부대마저도 ‘오참봉 의병 부대’로 불렸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망국에 이르게 되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청토오적소(請討五 賊 疏)’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매국 대신들 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며 구국 의병항쟁을 주창하였 다. 1906년 1월, 면암이 충남 논산 노성의 궐리사에 서 각지 유림을 모아 시국강회를 열고는 국권회복투 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시국강회에 참석한 오성술은 강회가 끝난 뒤 면암을 뵙고 창의의 뜻을 밝히자, 면암은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 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이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를 바라네” 라고 당부하였다. 이때부터 오성술은 거의(擧義) 준 비를 서둘렀다. 병서를 탐독하며 널리 동지를 모으 고자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라의 흥 망이 경각에 이르렀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 나 혈기방장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 아 있겠습니까?”하고 거의의 뜻을 펴자, 아버지 오영 선은 이에 적극 찬동하며 전답 50여 마지기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창의 깃발을 들다 1907년 2월, 오성술은 고향마을 용진산을 근거지 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 깃발을 들었다. 그때 오성술 의병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대장 오성술 도통장 오상렬(吳相烈) 선봉장 김성현(金聖鉉) 중 군장 오원규(吳元圭) 도포장 김봉선(金奉先) 호군장 이종석(李鍾晳) 후 오성술 의병장(1884~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