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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4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용정의 서전서숙 설립과 신민회 창건을 주도하다 이 무렵, 석오는 전덕기(全德基) · 양기탁(梁起鐸) · 이 회영(李會榮) 등이 설립한 상동교회(尙洞敎會) 안에 부설한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1905년(고종 42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서 강제 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석오는 상동청년회원들과 함께 대한문(大漢門) 앞에 나아가 연좌시위를 벌이며, 조약의 폐기를 호소하였다. 이 때, 석오는 일본 관헌 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후로 왜 경(倭警)의 감시에 시달렸다. 이로써, 석오의 독립운동은 더 이상 국내에서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06년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로 망명, 이상설(李相卨) · 여준(呂準) · 정 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 여 인재양성에 나섰다. 그런데, 1907년 4월 서전서 숙의 숙장(塾長)을 맡고 있던 이상설이 고종황제(高宗 皇帝)의 특사로서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Hague)에 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The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간도를 떠 나게 됨으로써 서전서숙이 재정난에 빠지게 되고, 또 일제가 감시의 손을 뻗어오게 되어 더 이상 이 곳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석오는 국내로 돌아와 안창호 · 양기탁 · 이회영 · 전덕기 · 주진수(朱鎭 洙) · 이갑(李甲) · 신채호 · 안태국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창설하였다. 이 때 양기탁이 총감독을, 석오가 총서 기를 맡아서 국권회복에 앞장섰다. 신민회의 창설목표는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해 외에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1910년(순종 4년) 3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 녕 · 주진수 · 안태국 등이 모여 ‘대일(對日) 무력투쟁’ 노 선을 선언하고, 만주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초대교장을 맡다 석오는 이러한 결의에 따라, 서울의 이회영 6형제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환 영회 모습. 이승만(가운데 화환 걸친이)의 왼쪽부터 이동휘(왼쪽), 이 시영, 이동녕. 손정도. 이승만 우측에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이 서있 다(독립기념관 제공). 중국 남방 가흥(嘉興) 피난시절 임시정부 요인들(1935년 추정). 앞 줄  왼쪽부터 송병조, 이시영, 김구, 이동녕, 요인들을 돕던 중국인(국가 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