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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3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는 것 때문에 전국 각지에 서 이에 항거 하는 의병이 봇물처럼 터 져나왔다. 이 때, 의병항쟁 의 중심에는 척왜론(斥倭 論)과 위정척 사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다 이 때의 의병을 을미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을미의 병’이라고 한다,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지평의 이춘 영(李春永) · 안승우 · 홍사구, 강릉의 민용호, 원주의 이 인영, 제천의 류인석 · 서상렬(徐相烈) · 이필희, 평해의 신돌석(申乭石), 안동의 권세연 · 김도화, 영양의 김도 현 · 조승기(趙承基), 문경의 이강년, 의성의 김상종(金 象鍾), 김천의 이기찬(李起燦) · 허위 · 여중룡(呂中龍), 회덕의 문석봉(文錫鳳), 홍주의 김복한 · 이설(李偰) · 안 병찬, 진주의 노응규 · 정한용(鄭韓容), 나주의 기우만 이 창의하였다. 이 때, 해운당 김하락은 경기도 이천에서 조성 학 · 구연영 · 김태원 · 신용희와 더불어 창의하였는데, 이것이 이천의진이었다. 해운당은 안성의병장 민승 천(閔承天)과 연합하여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추대 하고, 자신은 도지휘(都指揮)가 되었다. 그로부터 며 칠이 지난 후, 1896년(고종 33년) 1월 17일 백현(魄 峴)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어진 2월 12일 이현(利峴)전투에서 크 게 패하여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에 해 운당은 박주영(朴周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용 을 수습하였다. 그 후, 해운당은 광주(廣州)산성 의진의 요청에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양근의진(楊根義陣)과 합 류, 세 의진이 남한산성의진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의진은 1896년 3월 22일 서울 진공작전 을 개시하였데, 관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때, 김귀성(金貴星)이 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준 탓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의병장 김하락, 1896년 7월 자결 순국 이로써, 해운당은 이천으로 내려와 의진을 재정비 하고, 새롭게 이천의진의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 리고, 4월 9일 의진을 이끌고 이천을 떠나 여주 · 흥원 (興原) · 백운산 · 제천 · 단양 · 영주(榮州)를 거쳐 의성에 도착하였다.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었다. 이 때가 4월 28일이었다. 이로써, 해운당 이천의진의 새로운 활 동이 시작되었다. 이 때, 의성의진)의 요청에 의하여 홍주의병장 김복한 의성의병장 김상종의 격문(《인천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