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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⑬ 83 에 모셨다가, 해방 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모셨습니다.” - 후손으로서 희망사항은? “요즘 새로운 지번과 거리 이름을 부여하 는 모양인데, 할아버지 생가마을 거리를 당 신 호를 딴 ‘대천로(大川路)’로 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는 지자체제에서도 별도  예산이 드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저희 할아 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의병이나 애국지사  생가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대담을 마치고 일어서자 조세현 선생은 나에 게 기왕에 여의도까지 왔으니, 광복회와 국가보훈처 관계자 분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권하기에, 옆방의 광복회 여러 인사와 위층의 보훈처 관계자들 을 만나 그 자리를 빌려 후손들의 사는 모습과 그분 들의 애로사항을 전했다. 두 기관 모두 앞으로 회원 들의 권익과 보훈업무에 더욱 심기일전하여 보살피 겠다는 말씀을 듣고서 광복회관을 벗어났다. [조경환 의병장 행장]  조경환(曺京煥) 의병장은 1876년 2월 14일, 전라 남도 광산군 서방면 산안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신 안동) 에서 태어났다. 9세부터 22세까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900 년부터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하여 산세와 지리를 답 사 기록하고 당신 호를 ‘대천(大川)’이라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1907 년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조경 환은 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1907년 12월 초 순 광주·함평 등지에서 이원오(李元五)·김동수(金東洙)· 양상기(梁相基) 등과 뜻을 모아 12월 10일 함평 김태 원(金泰元)을 찾아갔다. 그때부터 조경환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 였다. 1907년 12월 14일 새벽, 함평 성내의 일본군을 급 습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고, 총 18정 및 다수의 화약과 탄환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 이후 조경환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었다. 1908년 1월 1 일 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창평 무동촌에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내습하는 일본헌병대를 맞아 싸 워, 대장 요시다[吉田] 이하 수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4월 25일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 조 경환은 의병진의 중의(衆議)에 따라 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다. 이후 조경환은 ‘호남창의대장’이라는 이름 으로, 각지 향교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사상 을 고취시키는 한편,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산 흑석 일본군 야마다(山田)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부대가 1909년 1월 10일 광 주 어등산에서 몰래 정탐한 조경환 의병부대 관련 동정을 기록한 일본군의  『진중일지』 3권(152쪽, 국가보훈부 젝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