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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갑신정변, ‘삼일천하’로 끝나다 83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특히,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의 수습을 위해 조 선에 파견된 청 나라의 군대가 조선의 내정과 외교 에 간섭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탈에 걸림돌 이 되고 있었다. 일본이 급진개화파의 자주적 혁신 정책을 지원한 것은 청나라와의 경쟁에서 우월적 지 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때, 개화파는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는 우 정총국(郵政總局)의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화파는 일본 군대 200명의 도움을 받아 개국 축하연이 한창이던 밤 10시경 우정총국 북쪽에 있는 민가에 불을 놓고, 이를 신호로 정변의 막을 올렸다. 이날이 1884년 12월 4일이었다. 개화파의 사전계획에 의하여, 고종(高宗)과 왕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모시고, 친청수구파인 한규 직 · 윤태준 · 이조연 · 조영하등과 민비(閔妃)의 척족인 민태호 · 민영목 등을 살해하였다. 이날의 정변을 눈 치채지 못한 수구파들이 당한 참변이었다. 12월 5일,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은 개혁내각의 구성에 착수하였다. 영의정 이재원(李載元, 고종의 종형),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좌우참찬 이재면(李載冕, 흥선대원군의 장자), 이 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신기선(申箕善), 예조판서 김 윤식(金允植), 병조판서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 의 조카),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 필 등이었다. 이때, 조정의 주요 요직에는 개화파 외 에 국왕의 종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화파 혁신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청나라 와의 주종관계를 청산하고, 대내적으로는 문벌을 폐 지하고 만민평등사회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14 개조의 개혁정강’을 선포하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이에 당황한 민비와 그 척족들은 청 나라의 위안스 카이(袁世凱, 1859~1916)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이 에 원세개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1,500여 명의 군 갑신정변의 현장이었던 우정총국 본관 건물(펜앤드마이크 제공) 갑신정변의 주역들(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