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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⑪ 83 로 이감케 되었다. 당시에는 교통 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영산강 포 구로 가 거기서 배를 타고 부산으 로, 부산에서 육로로 대구에 갔던 모양이다. 오의병장이 일본 순사 에게 포박된 채 영산강 포구를 떠 나게 되었다. 부인은 그 기별을 받 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부자상봉을 위해, 석 달된 아들 을 포대기에 안고서 영산포 포구 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비와 아들은 영 산강 포구 뱃전에서 처음이자 마 지막 상봉을 하였다. 아비는 수갑 에 채이고 오랏줄로 꼭꼭 묶인 채 포대기의 아들을 보고서는 사내대장부가 처자에게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올랐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 부자는 이심 전심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임을 떠나보내는 남포나루에는 슬픈 노래가 흐른 다”는 고려 정지상의 ‘송인(送人)’ 한 구절을 연상케 했다. 갓난아이를 사이에 둔 젊은 부부의 영산강 나 루터 이별은 아마도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이었으리 라. “여보, 잘 가시오.”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 잘 부탁하오.” “염려 마시오.” “ ……… ” 부인 나씨는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 들을 누가 볼세라 시집을 떠나 몰래 길렀다. 일제 군경과 밀정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나주군 문평면 쌍정마을 친정 남동생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 아들은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자라면서도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악몽 같은 일제강점기를 넘겼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웃으며 들었는데 곧 눈시울이 젖었다. 그 무렵 이런 비극이 이 집안뿐이 었겠는가? 왜 우리나라에는 해방 후 이런 애국자 집 안들이 빛을 못 볼까? 잘못 낀 첫 단추는 그 언제 바 로 잡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안 이야기를 듣는 새 승용차는 송정리역 앞에 머물렀다. 늦은 점 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송정리역은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다. 1969년 3월 1일 새벽, 광주 보병학교에 입 교하고자 용산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와 이곳에 내렸 영산강 포구. 구한말 호남 의병들이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으로 이송될 때, 건넜던 피눈물의 강이다. 그 무렵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영산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다시 대구로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