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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⑦ 83 심어주고자, 겨레의 제단에 당신을 오롯 이 바친 말씀이다. 1905년 11월 을 사5조약(‘을사늑약’ 이라고도 함) 강제체 결 이후 호남 의병 운동의 첫 도화선이 된 것은 1906년 면 암 최익현의 의병봉 기였다. 최익현은 당 대 척사파(斥邪派 위 정척사파의 준말로 주자학을 지키고 서양의 세력을 물리치자는 학파) 의 거두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었다. 홍영기 교수(순천대)는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이 전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태인 에서 처음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타 지역에까지 영향 을 미쳤다.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정부 찬정을 지낸 최익현과 낙안군수 임병찬 등이  봉기를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열흘 동안 활동하다가  관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홍영기, 『대한제국 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153쪽). 태인 의병은 약 열흘 만에 끝났지만, 이후 호남 의 병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면암의 뜻을 이은 인물 로 백낙구, 기우만, 고광순, 이항선, 강재천, 기우만, 박봉양, 양한규, 양회일, 이석용, 전해산 등 이 루 헤 아릴 수도 없는 많은 이들이 호남 의병의 맥을 이어 갔다. 최익현 전적지 답사에 앞서 후손을 수소문했더니 현손(고손자) 최창규 교수(전 서울대, 독립기념관장 역임)가 몇 해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좀처럼 만나기 가 어렵다고 했다. 마침 나의 또 다른 길 안내자인 조세현 의병정신 선양회 부회장이 당신과 최 교수 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능한 면담이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겠다고 하여 한 달 남 짓 그 답을 기다리자 마침내 기별이 왔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 미리 나는 오용진 순국선열 회 부회장의 안내로 미리 충남 모덕사와 면암 묘소 까지 순례를 마쳤다. 조 부회장으로부터 2008년 5 월 6일에 요양 간 최 교수가 서울 집으로 돌아온 날 이라는 기별과 함께 그날 오후에 대담시간을 약속 해 뒀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1905년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73세 때 초상화 (보물 제1510호,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위키백과  제공)  최익현의 문집 『면암선생 문집』에 실린 「병인의 소(丙寅擬疏)」(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