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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6 · 25전쟁이 남긴 교훈 83 그 날 저녁부터 피란민들의 줄이 이어졌다. 나중에 는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도, 그 때가 여름 철 이어서 아무 곳이나 자리를 펴고 잠을 잘 수가 있어 서 다행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부 모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짐보따리를 잃어버린 아낙네의 넋나간 모습, 칭얼대는 갓난 아이를 달래 는 젊은 어머니의 굳은 표정들. 이 모두가 어린 필자 를 한없이 슬프게 하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은가. 열흘도 지나지 않아 서 가지고 온 식량이 바닥나 이제는 더 이상 먹을 것 이 없었다. 이 때부터 허기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무 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야만 했다. 나무뿌리도 캐 먹고, 풀잎도 뜯어 먹었다. 이렇게 보낸 3개월여 피 란생활은 어린 필자에게도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 고초를 어찌 필설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6· 25전쟁 3년여의 공방 피해 막심 1950년 9월 15일, 우리 가족이 피란민들 틈에 끼 어 어렵게 지나는 사이에 맥아더(D. MacArther) 총 사령관이 지휘하는 UN군과 우리 국군이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하면서 6 · 25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9월 28일, 서울의 중앙청(1995년 8월 철거 됨)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기 쁨을 누렸다.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UN군은 패주하 는 북한군을 쫓아 북진을 계속하여, 9월 30일에는 마침내 38선에 이르렀다.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미군 제10군 단(군단장 Edward N. Almond 중장)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뒤 이어 미군 제7사단 제17연대 가 개마고원의 장진호(長津湖) 북동쪽에 위치한 함 경 남도 갑산(甲山)에 도착하였다. 이 때, 미군 제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 있었 다. 그리고, 10월 19일 우리 국군 제1진이 평양에 입 성하였으며, 26일에는 북진을 거듭화여 압록강변 초 산까지 진격하였다. 이로써, 우리가 그리던 조국통일 이 눈앞에 닿아 있는 듯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10월 25일, 중공군(中共 軍)이 참전하면서 다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으며, 그 악명높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국군과 UN군은 작전상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6 · 25전쟁은 밀고 밀리는 3년여에 걸친 장기전으로 변하고 말았 다.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 나도 컸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온 산야가 피로 물 들었다. 그리고, 피아간 인적 · 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 월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군 사망 149,005명, 부상 717,083명, 실종 132,256명이었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전쟁미망인 6 · 25전쟁 당시 경북 안동. 시가지가 불타는 것을 피란민들이 산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박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