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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시론 • 한일의정서,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들다 83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 이지 않고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팽 팽하게 맞섰다. 이 때, 러시아가 우리 조정에 손을 내밀게 되었는데, 청 · 일 두 나라의 세력 을 견제할 목적으로 조 정에서는 친러적(親露 的) 정책으로 기울게 되 었다. 이처럼 외세의 각 축장이 된 우리나라는 날이 갈수록 여려워져 만 갔다. 이러한 와중에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이 일어나 민심은 더욱 어 수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친일성향의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출범하여 내정개혁을 단 행하였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때, 임시합의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박정 양(朴定陽) · 김가진(金嘉鎭) · 김윤식(金允植) · 안경수 (安駉壽) · 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의 위원을 임명하 고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군국기무처는 6월 25일 부터 업무를 시작하여 중앙정부조직을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로 나누고, 권력의 중심을 의정부로 옮기면서 국왕의 전제권을 제약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청 나라와의 주종관계를 청산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개혁의 배후에 오오토리 게이스케(大烏圭介) 일본공사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침략의 발판에 지 나지 않았다. 그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갑오개혁을 통하여 한국 의 내정을 요리하려는 일본의 개혁이 명성황후에 부 딪침으로써 이의 제거에 나섰다. 일본은 군인 출신의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외교의 경험이 전혀 없는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를 공사로 조선에 파견하여, 대한정책의 걸림돌인 ‘민비(閔妃) 제거’를 계획하였 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5시, 암호 명 ‘여우사냥’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우라는 검객과 낭인들을 경복궁에 침투케 하여 궁궐 뒤편의 황후침 실인 옥호루로 난입하여 황후를 살해하였다. 이제 걸 림돌이 없어졌다. 일본은 친일내각을 앞세워 11월 17일을 1896년 1 월 1일로 변경하고, 양력을 쓰게 하였다. 이것을 을 미개혁이라고 불렀다. ‘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 · 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 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 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