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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서(金化西) 1886~미상/의병/건국훈장 애국장 1907년 7월부터 9월까지 정봉준의진(鄭鳳俊義陣), 1908년 2월경부터 7월까지 오희원의진(吳喜元義陣) 과 유순만의진(柳順萬義陣)에 참여하여 경기도 죽산 (竹山),여주(驪州), 강원도 원주(原州), 충남 공주 (公州) 등지에서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결성된 정봉준의진은 1907년 9월까지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김화서는 1907년 7월 27일 정봉준의 휘하 에서 화승총 200정과 곤봉 50정을 휴대한 의병 200 명과 함께 죽산군 백암리(白岩里) 장터에서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 경기도 안성(安城)·여주,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21일 의병 100여 명과 함께 충주(忠州) 목계(木溪)에서 일본군 10여 명과 교전하였다. 6월 28일에는 유순만 의진에 가담한 뒤, 같은 달 30일 문의군(文義郡) 서삼도면(西三道面)상외리(上外里)와 7월 3일 서삼도면 입암리(立岩里) 등지에서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1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죄 및 폭동죄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4년 징역 11년 3월, 1915년 징역 8년 6얼 7일로 감형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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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락(金榮洛) 1888.11.17~미상/만주방면/건국훈장 애족장 1919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삼도구(三道溝)에 소재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동지를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에 만주 각 현(縣)에 흩어져 있던 의병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모여 각 단체를 해산하고 조직하였다. 본부(本部)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 (三源浦)에 두었는데 중앙기구는 도총재부(都總裁部)였으며,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 부총재는 백삼규(白三圭)였다.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總團)이 있었으며, 총단장에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에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이 활동하 였다. 김영락은 1919년 5월 중국 집안현 삼도구 삼도양분산(三道陽分山)에서 이기섭(李基涉) 등의 벌목공을 대상으로 대한독립단 가입을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27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살인죄로 징역 15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같은 해 11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8년 10월 5일 평양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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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영(吳彦泳) 1901.05.12~1971.01.21/3.1운동/건국포장 충북 충주(忠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체포 되어 옥고를 치렀다. 오언영은 충주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동지들과 시위날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을 요구하는 경고문, 독립가 등을 만들며 시위 준비 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오언영은 재판과정에서 "조선민족으로 정의 인도에 기초해 (독립) 의사를 발동한 것은 죄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지만, 1919년 9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