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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5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홍 교수가 하루 빨리라도 원본 영인본 제작이 필 요하다고 강조하자 황 선생은 그 필요성에 공감하였 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문화재에 대한 경시 풍조 를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라의 문화재를 다루는 장 관은 최고의 지성인을 발탁하여야 함에도, 역대 정 권들은 문화의 개념도 모르는 이나 권력의 나팔수들 을 뽑기가 일쑤였다. 마침 나의 다음 답사지가 임실 이석용(李錫庸) 의 병장이라 순천 역에서 남원 행 열차를 타고자 나서 자 두 분이 역까지 배웅해 주셔서 순천 역을 배경으 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황현 선생 행장] 황현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1855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현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서 태어났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보이자 아버 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여덟 살짜리 꼬마를 구례 에 사는 형수 왕씨에게 맡겼다. 구례의 대시인 왕석보(王錫輔)의 문하에 수학시 키고자 함이었다. 왕석보는 어린 황현의 시재를 보 고 크게 칭찬하였다. 황현이 훗날 시인으로 크게 이 름을 떨치게 된 바탕은 왕석보의 가르침이었다. 청 소년기에는 호남의 대유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 正鎭)을 찾아가 배우기도 하였다. 20대 중반, 황현은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이때 이건창, 강위, 김택영 등 과 깊이 사귀었다. 1883년(고종 20),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별시(別 試)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 초장에 그의 글 이 첫째로 뽑혔다. 하지만 시험관이 황현이 시골 출 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황현은 조정의 부패 가 극심함을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 하지 않은 채 관계에 뜻을 접고 귀향하였다. 1888년(고종 25)에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서울로 가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 원급제,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 무렵 나라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로 청국의 적극 간섭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 심했다. 황현은 다시 부패한 관료사회와 결별을 선 언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 만수동으로, 다시 광 의면 월곡 마을로 거처를 옮긴 뒤 조그만 서재를 마 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 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 대담을 마치고 순천 역 앞에서 (왼쪽부터 황승연 선생, 필자, 홍영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