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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5년 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월 13일 기각됨에 따라 교수형이 확정, 그해 5월 30 일 대구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후손 양일룡씨는 서울대 도서관(규장각)에서 당시 일제가 발행한 관보를 발굴하여 양진여 의병장의 교수형 집 행 날짜를 정확하게 알아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양 진여 의병장은 순국 당시 다음의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 [양상기 의병장 행장] 양상기(梁相基) 의병장은 1883년 10월 10일 광주 군 서양면 니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설죽(雪竹)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운 풍암정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20대 초반 부자가 모의 위장하여 광 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1908년 4월 23일, 아버지 가 의병장인 것이 알려져 순사 직에서 면직되자 곧 장 본격적인 대일 항쟁 의병의 길로 들어섰다. 1908년 5월에 거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된 양상 기 부대의 규모는 최대 80여 명이었던 바, 주로 화승 총으로 무장하였다. 이 부대의 편제는 도통장에 안 판구(安判九), 후군장에 이문거(李文擧), 포군장에 안 일제의 '남한폭도 대토벌' 기념사진집에 수록된 양상기  의병장(가운데)과 부하들 양진여 의병장 판결문(1910.3.5, 국가기록원 제공)  양진여 의병장 묘소(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