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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4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대낮의 방사(房事) 오성술 의병장은 16세에 결혼했지만 슬하에 자식 이 없었다. 그가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 물지 않았으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 었다. 거기다가 외아들이었다. 일본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의병 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 의병부대가 주둔하 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어머니(오용진 선생 증 조할머니)는 부대로 찾아가 아들에게 옷이라도 갈아 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아들은 차마 어머니의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의병장이 옷을 갈 아입고자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 씨, 오의병장 부인)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 서 문고리를 잠그고 치마로 방문을 가렸다. 그로부 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제 아버님을 점지해 주신 삼신할머니와 조상님 이 고맙습니다.” 오용진 선생은 이야기 도중에 고맙다는 말을 몇 차례나 했다. 당신 집은 나주 오씨 종가로 그동안 직 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는데, 국난 중의 단 한나절 방사에도 대를 이은 신통함이 조상 의 도움이나 삼신할머니의 점지 없이 어찌 가능하겠 냐는 얘기였다. 마침 나도 중국대륙 항일유적답사 길에 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도 단 한 차례 대낮의 방사로 득남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영산강 포구의 슬픈 노래 오성술 의병장은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그는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 의병들의 무기제작소 들머리 ‘석문동천’ 표지석 석문산 전적지 앞의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