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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4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대답은 했지만 여태 다시 찾지 못했다. 우리 일행 은 다시 출발지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오자 그새 저녁 8시가 넘었다. 광주행 막차를 타려는데 양 의 병장 후손들은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다면서 갈 길 바쁜 나그네의 소매를 꼭 잡았다. 그 따뜻한 인정에 이끌려 한 밥집에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마침 밥 때 를 놓쳐 시장한데다가 그 고장 특미의 육회 비빔밥 을 들자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제야 밝은 자리에서 주객은 소주잔을 나누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분들은 나의 신상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양동하 전 능주 전교는 내 고향을 물었다. “경상도 선산 구미 금오산인입니다.” “네에? 경상도 선비가 멀리 호남에 오시다니 참 귀 한 손이오.” 양 전교는 깜작 놀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1906년) 우리 집안은 양 장군 거의로 가 산 을 탕진하여 그 뒤로는 힘을 못 썼지요. 그래서 자손 들을 대학에도 제대로 못 보냈다오. 하긴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면 충신 집안은 멸문을 당했다니 더 할 말이 없소만, 나라를 되찾았으면 집안이 다시 힘을 써야 할 건데, 어찌 그리 못하고 있소.” “「왕대밭에 왕대난다」고 하지요. 앞으로 이 집안에 서 반드시 나라의 큰 인물이 나올 겁니다. 저는 독립 운동가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이 나라에 민족정 기가 바로 살아날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 고맙소. 영남 분이 자기 고장 의병장보다 호 남 의병장부터 먼저 찾아준 점은 참으로 고맙고. 내 생전에 언제 다시 한 번 찾아주시오.” 쌍산의소의 만세바위, 훈련 중 의병들은 이 바위 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양 전교는 내 손을 꽉 잡고는 잠깐 만남을 못내 아 쉬워했다. 후손 양금렬 씨에게 틈틈이 의병대장 집 안의 종손으로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쌍산의소 항일의병의 막사터 의병성 유적